[문화마당] ‘위대한 침묵’과 ‘워낭소리’/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문화마당] ‘위대한 침묵’과 ‘워낭소리’/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입력 2010-01-21 00:00
수정 2010-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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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월도 20일이 지났다. 2010년은 더 이상 새해가 아니다. 영어로 1월을 가리키는 ‘재뉴어리(January)’의 어원은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라틴어 야누아리우스(Januariu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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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야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문(門)의 신인데, 그 모습은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두 개의 얼굴로 그려진다. 두 개의 얼굴은 지난해와 새해, 곧 과거와 미래를 상징한다.

1월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시간이 과거와 미래로 존재한다. 현재는 실체가 없는 제로(0)의 시간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정지하고 영원한 현재를 사는 존재가 신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음의 존재다.(I AM WHO I AM)”라고 답하셨다. 이 ‘있음의 존재’를 부처님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씀하셨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시간 밖에 존재하는, 곧 과거와 미래로 나눠짐이 없는 영원한 현재의 지속으로 있는 ‘있음의 존재’가 신이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없음의 존재’인 인간이 ‘있음의 존재’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영화 ‘위대한 침묵’은 그 길을 보여준다.

정초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다. 영화는 162분간의 침묵의 영상으로 이야기한다. 영화란 서사다. 그렇다면 침묵의 서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있음의 존재’는 불립문자(不立文字)다. ‘있음의 존재’는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서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한다.

인간이 시간을 인지하는 것은 변화와 이야기를 통해서다. 변화가 없고 말이 없는 곳에서만 인간은 시간 밖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의 장소가 ‘위대한 침묵’이 보여준 수도원이다. 변화를 막는 반복과 이야기의 진공상태를 만드는 침묵의 장소인 수도원의 일상은 무시간으로 초시간을 추구한다.

우리가 빨리빨리 사는 이유는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빨리빨리 살면 살수록 변화는 더 빨라지고 우리는 그만큼 ‘있음의 존재’로부터 멀어진다. ‘있음의 존재’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느림의 삶(slow life)을 살아야 한다.

1년 중 어느 달보다 해가 바뀌는 1월에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간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래서 시간을 쪼개 쓰기 위해 1년의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무엇을 위해 그렇게 부지런히 사는 것일까. 1월이라는 과거와 미래의 경계선상의 시간에서 우리는 존재의 삶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작년 이맘때 나는 ‘워낭소리’에 나오는 소를 보면서 바쁘게 살았던 나의 일상을 반성했지만, 2009년 한해를 또 시간의 노예로 살았다. 이런 나에게 ‘있음의 존재’인 신은 2010년 1월 ‘위대한 침묵’으로 또 다시 은총을 베푸셨다.

‘워낭소리’와 ‘위대한 침묵’ 모두 감독이 함께 살면서 일상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할아버지와 소의 일상적 삶을 찍었다면, 후자는 수도원에서의 종교적 일상을 담아냈다.

둘 모두는 느림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보여준다. ‘있음의 존재’는 성과 속, 아니 계신 곳이 없다. 때로는 소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노동을 하시거나, 종소리로 들리거나, 침묵으로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해준다.

‘위대한 침묵’을 제작한 필립 그로닝 감독은 1984년 카르투지오 수도회 수도사들을 만나 수도원 촬영을 허가해달라는 신청을 했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99년 감독은 수도원으로부터 촬영을 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2005년 영화를 완성했다. 왜 20년이라는 준비기간이 필요했을까?

세상의 종말이 기후변화로 서서히 올지, 핵전쟁으로 갑자기 도래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침묵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하느님의 때’가 오고 있다.
2010-01-2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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