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술과 차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더덕의 뿌리는 오래전부터 피로 해소에 좋다고 알려져 왔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식물세밀화에는 식물의 뿌리부터 줄기, 잎과 꽃, 열매, 종자 등 모든 기관이 기록돼야 한다. 하지만 나무의 경우 뿌리를 보지 못할뿐더러 단지 기록을 위해 수십년을 살아왔을 나무를 뿌리째 뽑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므로 나무 식물세밀화에는 뿌리를 그리는 일이 없다.
하지만 풀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우리는 풀의 뿌리를 이용하는 일이 많고, 뿌리의 형태는 식물 식별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풀 그림에는 뿌리의 기록이 필요하다.
신장 기능 향상, 소화 촉진, 비만 예방 등 우엉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우엉차의 인기도 높아졌다.
그림을 다 그리고 뿌리를 다시 심기도 하지만 그리는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다 보니 다시 심어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다시 심어 주기 위해 빨리 관찰해 기록해야 한다는 시간적 압박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 개체의 희생보다 값진 기록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 압박과 부담은 좋은 기록을 만들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체로 뿌리를 채집하는 것을 최소화하거나 이미 채집돼 만들어진 표본을 보고 그리는 경우가 많다.
식물의 뿌리는 강한 비바람 속에서도 식물이 꿋꿋이 서도록 지탱해 주고, 토양의 수분과 양분을 흡수해 지상부에 보내는 역할을 한다. 우리 눈앞에 이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존재하는 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수리취 뿌리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다시 심어 준 날, 동료들과 수목원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으니 사장님이 우리에게 후식으로 따듯한 차 한 잔씩을 주셨다. 식당 뒷밭에 심은 더덕을 캐어 물로 씻은 후 썰어 말린 뒤 물에 끓인 더덕차라고 했다.
향긋했다. 동료들은 자신의 손보다 작은 컵을 두 손으로 조심히 잡고 홀짝홀짝 차를 마셨다. 이 모습이 마치 ‘내 소중한 뿌리’라고 몸으로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수리취 뿌리를 뽑아야 할지 말지 고민하면서 한참을 밖에서 서성였던 터라 추위에 얼었던 몸을 더덕의 뿌리가 따뜻하게 녹여 줬다.
인류가 식물을 이용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차로 마시는 것만큼 식물을 귀하게 다루고, 예의를 다하는 일이 있을까 싶다. 수확한 뿌리를 깨끗이 씻어 햇볕에 말리고 볶기를 반복한 결과물을 다시 뜨거운 물에 우린 뒤 경건한 자세로 오랜 시간 음미해 가며 마시는 것. 어느 때보다 빠르고 편리해진 이 세상에서 잘 볼 수 없는 정성과 태도의 산물이다.
지금 내 앞에는 우엉차가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 나는 이 차를 즐겨 마신다. 농사를 짓는 이모 밭에 심은 우엉 뿌리를 수확해 가져와 깨끗이 씻은 후 썰어 오랜 시간 볕에 건조한 후 볶은 것을 뜨거운 물에 우린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땅속의 우엉 뿌리가 내 눈앞 한잔의 차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식물의 희생을 떠올리며,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이 차를 마신다.
이제 얼마간은 푸르른 풀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땅속 깊숙이 눈과 얼음을 방패 삼아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을 수많은 풀뿌리를 떠올리면 어쩐지 이 겨울 풍경이 마냥 삭막하고 황량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2019-12-05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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