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오늘 스코틀랜드에 추락한 전투기에 나치 2인자가 홀로

70년 전 오늘 스코틀랜드에 추락한 전투기에 나치 2인자가 홀로

임병선 기자
입력 2021-05-10 16:48
수정 2021-05-1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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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헤스는 아돌프 히틀러의 충실한 참모이자 친구였지만 제3 제국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자꾸 소외됐고 영국과의 화친 조약을 성공시키겠다는 절박감 때문에 혈혈단신으로 스코틀랜드까지 날아갔다는 분석이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루돌프 헤스는 아돌프 히틀러의 충실한 참모이자 친구였지만 제3 제국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자꾸 소외됐고 영국과의 화친 조약을 성공시키겠다는 절박감 때문에 혈혈단신으로 스코틀랜드까지 날아갔다는 분석이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1941년 5월 10일(이하 현지시간) 독일 공군기 메서슈미트 Bf 110이 스코틀랜드 이글샘의 플로어스 농장 근처에 추락했다. 조종사가 낙하산을 펼쳐 목숨을 구했지만 쇠스랑을 든 농부들에게 생포됐다.

조종사는 스스로를 알프레드 혼 대위라며 해밀턴 공작에게 전달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으니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다음날 아침 추락 지점에서 16㎞ 떨어진 둥가벨 하우스에 있던 공작을 만나게 해줬더니 그는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친구이자 제3 제국의 부총통인 루돌프 헤스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에르만 괴링 다음으로 나치 정권의 적통을 이을 인물이라며 영국과 독일의 평화협상을 중재하고 싶다고 했다.

리버풀에 있는 존 무어스 대학의 국제역사학 전공자인 제임스 크로스랜드 박사는 “짐작할 수 있듯 해밀턴 공작조차 그 말을 듣고 움찔할” 정도로 뜬금없는 협상 제의였다고 말했다.

영국 BBC는 이 일을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가장 괴이쩍은 얘기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날은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기 하루 전이었다. 왜 나치 고위직이 전쟁이 한창인데 홀로 적진 한 가운데, 1600㎞를 날아갔을까? 도대체 헤스는 어떻게 해밀턴 공작이 히틀러가 수락할 수 있는 평화협상안을 중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비행에 나서게 된 것일까? 크로스랜드 박사는 수십년 동안 이어진 음모론을 들먹이기도 했다. 영국 안에서 윈스턴 처칠 총리를 전복시키고 평화협상을 이끌기를 원하는 그룹이 촉발한 책동이란 얘기다.
1941년 5월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을 비행하다 추락한 독일 공군 전투기 메서슈미트 Bf 110 기 잔해 주위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1941년 5월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을 비행하다 추락한 독일 공군 전투기 메서슈미트 Bf 110 기 잔해 주위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하지만 기밀이 해제된 문서들을 연구하면 헤스는 평화 협상이 지지를 받고 있다고 오해해 환상에 젖어 이런 필사적인 비행에 나선 것이란 분석이다. 대전 초기에도 이런 중재 노력이 상당히 있었으며 처칠이 권력을 장악한 1940년 5월 이후 사그라들었다. 영국인과 독일인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를 공통의 적으로 여긴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40년 늦여름 그는 접촉선을 통해 영국 정부가 평화 협상에 나설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전쟁 전 베를린에서 해밀턴 공을 만났던 헤스의 친구 알브레히트 하우쇼퍼가 해밀턴 공작이라면 믿고 협상을 맡겨볼 만하다고 했다.

하우쇼퍼는 해밀턴에게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 편지는 영국 해외정보부 MI5 가 가로챘다. 이때쯤 헤스는 절박했다. 비행기 조종 연습에 몰두하며 해밀턴이 준비됐다는 전언만 해오길 기다렸다. 하우쇼퍼에게 재촉했더니 그는 평화를 원하는 영국인들이 많다고 했다. 헤스는 직접 담판을 해야겠다고 오판해 영국까지 날아가기로 했다. 크로스랜드 박사는 “헤스의 관점으로는 처칠의 입장에 반대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면 이들이 처칠의 전복에 나서 히틀러와 평화를 이뤄낼 준비가 돼 있다고 볼 수 있었다”면서 “헤스는 안달이 나 있었고, 순진하기도 해 환상에 빠졌고 이 모든 일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헤스는 안달이 나 있었을까? 그는 히틀러의 초기 충복이었다. 히틀러가 란스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부터 1923년 비어홀 푸시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그 때는 히틀러와 둘이 진정한 친구라고 믿었다. 하지만 제3제국이 전쟁을 일으키자 이너서클에서 그는 밀려나기만 했다. 대놓고 그를 따돌리고 조롱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히틀러의 믿음을 다시 얻겠다는 욕심이 과했다.

크로스랜드 박사는 음모론은 역사적 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기밀 해제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상당한 거리가 좁혀진다고 했다. 예를 들어 헨리 딕스 박사가 체포 직후 헤스를 만난 뒤 적은 첫 인상은 “피해 망상에 젖은 사이코패스”라고 했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는 자신과 히틀러가 영국을 존경해 전력으로는 독일이 우위에 있지만 영국이 더 이상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딕스 박사는 영국을 좋아한다는 것만이 헤스가 홀로 스코틀랜드까지 날아오게 만든 원동려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헤스가 이런 일을 시도할줄 몰랐다. 해서 나치 당은 그가 미쳤다고 선언했다.
1941년 1월 30일(현지시간) 나치 독일의 주요 지도자들 모습. 왼쪽부터 아돌프 히틀러(1889~1945년), 선전상 요시프 괴벨스(1897~1945년), 루돌프 헤스(1894~1987년), 로베르트 레이(1890~1945년), 나치 친위대(SS) 대장 한스 래머스(1879 ~1962년)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히틀러 총통 취임 8주년을 맞아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열린 나치 당 축하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1941년 1월 30일(현지시간) 나치 독일의 주요 지도자들 모습. 왼쪽부터 아돌프 히틀러(1889~1945년), 선전상 요시프 괴벨스(1897~1945년), 루돌프 헤스(1894~1987년), 로베르트 레이(1890~1945년), 나치 친위대(SS) 대장 한스 래머스(1879 ~1962년)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히틀러 총통 취임 8주년을 맞아 베를린 스포츠 궁전에서 열린 나치 당 축하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게티이미지 자료사진
헤스는 저유명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87년 스판다우 교도소에서 숨을 거뒀다. 93세로 천수를 누렸다. 다른 나치 고위직들은 1966년 석방됐는데 그는 홀로 독방에서 21여년을 더 지냈다. 이 때문에 나치 지도자들이 헤스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감추고 싶어 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2017년 배포된 문서들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소련 정권에 헤스를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다. 크로스랜드 박사는 이 일을 더 밝혀내고 싶은데 역사학자들의 전쟁 관련 연구에서 두 문단 정도만 언급하고 말아 한계를 많이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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