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능선에 시체 즐비…빨래 널어놓은것 같았다”
철원평야와 마주한 평강고원으로 지는 해는 아름다웠다.그러나 그 너른 평원의 수풀 속에는 석양의 평화스러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채기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6.25전쟁 당시 강원 철원에서는 해발 395m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가장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당시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황외원(오른쪽)씨가 후배 장교에게 당시 백마고지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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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강원 철원에서는 해발 395m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가장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당시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황외원(왼쪽)씨가 위령탑에 분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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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철원평야 백마고지(白馬高地)는 여전히 긴장감 속에 중부전선 비무장지대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다.
피 비린내 나는 한국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10월6일.
외신은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영리의 전황을 속속 타전했다.
해발 395m에 불과한,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고지에서 한국군과 중공군은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간 전세계 전쟁사에서 유례없는 혈전을 벌였다.
그것은 ‘포우(砲雨)’였다.포탄 27만여발이 고지에 쏟아졌다.산등성이는 하얗게 벗겨져 마치 백마가 누운 형상이 됐다고 한다.백마고지는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승자는 한국군이었다.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끝에 중공군은 1만여명,우리군은 3천4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단기간의 전투에서 거둔 전황으로는 세계 전쟁사에 남을만한 대승을 거뒀다.
6.25전쟁 당시 강원 철원에서는 해발 395m 백마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가장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다. 당시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황외원(오른쪽)씨가 참전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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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삼각 요충..‘백마고지를 사수하라’
1952년 10월6일 오후 7시15분께 중공군은 휴전 협상을 앞두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만세군’으로 불렸던 3개 사단 병력과 장비를 한국군 9사단과 미 2사단이 고수하던 백마고지에 투입,첫 공세에 나섰다.
당시 중공군은 포와 전차 등으로 지원에 나선 미 2사단의 우세한 화력으로 막대한 손실이 예상되는데도 휴전선 방어에 가장 강력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백마고지는 옛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의 중심축으로,이곳을 선점하면 중부전선은 물론 의정부 인근까지 장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대 요충지로 꼽혔다.
열흘간 고지 쟁탈을 위한 포탄 투하가 이어지자 해발 395m 고지가 1m 가량 내려앉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당시 9사단 28연대 9중대장으로 고지탈환 임무를 받았던 황외원(79.예비역 준장)씨와 같은 연대소속이었던 용재화(78.당시 통신병)씨가 12일 강원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전적기념관을 찾았다.
전쟁당시 포탄 파편으로 걸음이 불편한 황씨는 60년 전 기억을 되살리며 말을 이어갔지만 참혹했던 당시 상황과 희생된 전우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안색이 어두워졌다.
위령탑 앞에서 발길을 멈춘 황씨는 향을 피우다 “인해전술을 펼친 중공군은 ‘사람이 더 많나,총알이 더 많나?’는 식으로 끊임없이 공격해왔다”며 “그러나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일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오직 백마고지 사수가 전부였다”라고 말했다.
위령비를 지나 기념관에 들어서자 수거된 탄피를 녹여 만든 기념 동판,총탄으로 뚫린 녹슨 철모,휘어진 기관총 등이 즐비하게 전시돼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짐작케 했다.
정상에 다다르면 북쪽으로 7개의 능선을 이룬 백마고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마고지 오른쪽 뒤편으로 북한 고암산도 선명히 모습을 보였다.당시 우리 군의 승리로 끝나자 김일성이 사흘간 머물며 땅을 쳤다는 일명 ‘김일성 고지’다.
봄의 전령사가 전해주는 봄기운마저도 이곳 중부전선에서만큼은 무색하게 느껴졌다.광활한 철원평야에서 불어대는 바람이 초겨울 날씨처럼 온몸을 움츠러들게 하기 때문이다.
●선혈로 물든 육탄전..국군 위용 세계 과시
열흘간 대혈전을 치르면서 인해전술을 앞세워 수류탄만 들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을 격멸하는데는 국군의 많은 희생이 따라야 했다.
특히 당시 중공군은 술을 마신 뒤 꽹과리를 치며 돌진,우리 군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전우회원들은 입을 모았다.
용재화씨는 “슝~ 포탄소리가 들리면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안심했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극도의 불안감에 떨었다”며 “주야로 펼쳐지는 포탄전 화력으로 열흘 동안 밤이 없을 정도였다”라고 회고했다.
소대장으로 참전한 석종철(82)씨는 “일진일퇴의 격전때문에 백마고지 능선에 걸친 시체가 마치 빨래를 널어놓은 것 같았다”며 “전쟁 중 부대원을 잃은 것은 아직도 가장 가슴 아픈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백마고지 참전 용사들은 당시 어느 때보다 사기가 높아져 있었다.적의 공격으로 쓰러져가는 전우들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사기가 더욱 불타올랐던 것이다.
김수진(79)씨는 “꽹과리 소리가 얼마나 요란했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움을 주었지만,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리지는 못했다”라고 말했다.
박왕서(84)씨도 “당시 중공군은 수류탄을 멀리 보내려고 나무 막대기와 연결해 던지기도 했지만 우리군의 위용 앞에 결국 무너졌다”라고 말했다.
1970년 중국인이 펴낸 중공군인지(中共軍人誌)에서 조차 ‘군단의 전 장비를 소련식으로 교환하는 등 화력을 증강해 백마고지를 공격했다...이 전역에서 한국군 제9사단은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서지 않으며 투혼을 발휘,후일 백마사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박명호(79) 참전전우회 회장은 “고귀한 목숨을 바친 전우들의 희생을 잊어서도,이러한 엄청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도 안 된다”라며 6.25 60돌의 교훈을 되새기자고 당부했다.
백마고지를 선혈로 물들인 60년 전 흔적은 오간 데 없이,드넓게 펼쳐진 철원평야와 평강평야로 이어지는 수평선 위로 군무를 이룬 철새들만 자유롭게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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