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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권 없지만… 죽은 로펌대표 성폭력 사실은 묻히지 않았다

공소권 없지만… 죽은 로펌대표 성폭력 사실은 묻히지 않았다

손지민 기자
입력 2021-08-03 20:38
업데이트 2021-08-04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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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상세한 ‘불송치 결정문’ 이례적

추행·간음 10회… 동료들 진술 등 확인
피해자 알 권리 위해 구체적으로 통지
가해자 숨져도 ‘피해 사실 인정’ 길 열려
성폭행 자료사진
성폭행 자료사진
로펌 대표인 변호사가 초임 변호사를 성폭행한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피의자의 사망으로 사건을 종결하면서 성폭행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의 불송치 결정문을 피해자 측에게 보냈다. 통상 이런 경우 ‘공소권 없음’ 한 줄만 적어 보내기 마련이지만 이례적으로 구체적인 수사 내용을 적어 피해자에게 통지했다. 여성계는 성폭행 사건 피의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에도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일부 인정받을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3일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 이은의 변호사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달 21일 이 사건을 불송치 결정하고 9일 후 4장 분량의 피의사실 요지와 불송치 이유를 적은 결정문을 피해자 측에게 보냈다. 지난 5월 피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공소 제기는 불가능해졌지만, 수사기관의 의지로 성폭력 피해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경찰은 로펌 대표인 변호사 A씨가 지난해 3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A씨의 사무실과 법원을 오고 가는 차량 등에서 피해자 B씨에 대해 총 10회에 걸쳐 추행 및 간음을 저질렀다고 봤다.

B씨는 “대표가 고용 및 급여 권한을 갖고 있고, 실제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변호사를 해고한 적도 있어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A씨는 ‘한 다리만 건너면 서초동 (로펌) 대표들 다 안다’고 말할 정도로 인맥이 두터워 잘못 보이면 이직이 어렵다는 생각에 적극적인 저항이 어려웠다”고 진술했다. 이에 A씨는 “업무상 관리, 감독 관계는 맞지만, 소속 변호사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상호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기 때문에 수직적 업무환경에 놓여 있지 않았다”면서 “퇴사 이후의 관계는 고용관계와도 상관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B씨와 함께 A씨의 로펌에서 근무했던 동료변호사들은 그 당시 B씨가 거부의사를 표현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성범죄로 크게 좌절하고 있었다는 취지로 경찰에 진술했다. 또 수습변호사들에겐 평판조회 등이 채용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 진술도 나왔다. 다만 경찰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A씨의 혐의 여부는 판단하지 않았다.

앞서 지난해 12월 B씨는 A씨를 강제추행 등 혐의로 고소했다. 지난 5월 사건이 공론화되자 A씨는 같은 달 2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의 이번 불송치 결정문을 두고 수사기관의 의지가 있다면 성폭행 사건 피의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에도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일부 인정받을 가능성이 열렸다는 평이 나온다. 진실공방을 둘러싼 2차 피해도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변호사는 “물건이나 돈이 없어지는 절도 등의 범죄와 달리 성범죄는 가시적인 피해 확인이 쉽지 않아 수사기관을 통해 피해 사실을 인정받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피해자도 사건의 당사자이므로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내용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상세한 결정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 변호사는 경찰의 수사 결과에는 아쉬움이 있다며 검찰에 사건 재검토를 요구하는 이의절차를 밟겠다고 밝혔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2021-08-0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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