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선(44.블랙야크) 대장이 27일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8천m 이상급 14개 봉 완등에 성공하면서 14좌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14좌는 네팔 정부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9년 히말라야 원정을 개방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1950년 프랑스가 인류 최초로 안나푸르나를 등정했고,이후 1964년까지 14년 동안 14좌를 먼저 오르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화보]오은선 대장,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성공
◇안나푸르나(Annapurna,8천91m)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군에 있는 세계 10위의 고봉이다.산스크리스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1950년까지 누구도 탐사한 일이 없어서 지도 상의 공백지나 다름없었다.이 때문에 프랑스는 첫 등정 때 사전 정찰 없이 단 한 번의 시도로 정상에 올랐다.
프랑스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성공을 일궈낸 셈이다.이런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프랑스 원정대의 강력한 팀워크와 최신 장비 덕분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원정대는 모리스 에르조그가 대장을 맡았고 장 쿠지,루이 라슈날,리오넬 테레이,가스통 레뷔파 등 쟁쟁한 산악인으로 구성됐다.당시 최신 섬유인 나일론으로 만든 텐트와 경금속 소재인 두랄루민으로 만든 장비가 총동원됐다.
이들은 속공전법을 구사해 성공을 일궜다.하지만 에르조그 대장은 심각한 동상을 입은 탓에 하산 하고 나서 손과 발을 절단해야 했다.
에르조그는 나중에 등정기 ‘최초의 8천m 안나푸르나’를 펴낸다.이 책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산악 명저가 된다.
에르조그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에베레스트(Everest,8천848m)
네팔 히말라야에 속하며 네팔과 티베트 국경의 쿰부 히말라야에 자리 잡고 있다.최근 네팔에서는 이 산의 높이를 8천850m로 수정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이 산이 최고봉으로 발견된 지 100년 만에 등정이 이뤄졌다.1953년 영국의 9차 원정대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가 산악인의 숙원을 풀었다.영국의 원정은 1921년부터 32년 동안 9차례나 계속됐다.
영국은 1852년 인도를 통치할 때 삼각측량을 통해 이 산이 세계 최고봉임을 발견했다.티베트에서는 ‘세계의 여신’이라는 뜻의 ‘초모룽마(Chomolungma)’라 불리고 네팔에서는 ‘눈의 여신’이라는 뜻의 ‘사가르마타(Sagarmatha)’로 통한다.
영국은 측량 활동에 공이 컸던 측지학자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새롭게 이름을 붙였다.이 때문에 최근에는 현지에서는 원래의 이름을 찾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존 헌트 대장은 명저 ‘악센트 오브 에베레스트(The Ascent of Everest)’를 남겼고,힐러리는 ‘나싱 벤처,나싱 윈(Nothing Venture,Nothing Win)’이라는 등반기를 썼다.
◇낭가파르밧(Nanga Parbat,8천126m)
국내에는 여성 산악인 고미영 씨가 지난해 7월 하산하다가 실족해 사망한 산으로 잘 알려졌다.
14좌 가운데 9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며 파키스탄 북동부와 인도 사이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히말라야 산맥 서쪽 끄트머리에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벌거숭이산’이라는 뜻이며,별칭은 ‘산의 왕’이라는 의미를 담은 ‘디아미르(Diamir)’다.
특히 까다로운 루트는 남동쪽의 루팔벽으로 오르는 코스다.루팔벽은 표고차가 무려 4천500m이며 세계 최장의 암벽으로 악명 높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 때문에 에베레스트 남서벽과 로체 남벽 등과 함께 가장 난도 높은 루트로 꼽힌다.1953년 헤르만 불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할 때까지 7회에 걸쳐 31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불은 대장의 퇴각 명령을 거부한 채 5캠프에서 표고차 1천220m를 혼자서 17시간 만에 등반해 정상에 섰다.하지만 하산할 때 산소결핍증 때문에 환각에 시달렸고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선 채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불은 현대적인 보조 기술 도구를 쓰지 않고 정상에 올랐기 때문에 ‘초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죽음을 넘나들던 이야기는 저서 ‘8천m의 위와 아래’에 담았다.
고미영 씨는 작년 디아미르 루트로 올라 등정에 성공했다.이 루트는 편마암으로 구성된 낭가파르밧의 서쪽 디아미르 계곡에서 정상으로 이어진다.
고 씨는 해발 6천200m 지점의 ‘칼날 능선’에서 실족했다.보통 하산할 때 산악대원들은 서로 로프에 몸을 묶는데 ‘칼날 능선’은 눈사태와 낙석이 많아 로프를 사용하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다.
낭가파르밧을 3차례 오른 산악인 엄홍길 씨는 1990년 루팔벽 루트로 등정을 시도했다가 포기했고 1992년에는 디아미르 루트로 정상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정상 부근에서 갑자기 눈이 많이 온 탓에 돌아섰고,동상에 걸려 엄지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다.엄 씨는 1999년 디아미르 루트에 다시 도전했고 결국 정상 등반에 성공했다.
◇K2(8천611m)
14좌 가운데 가장 등반이 어려운 산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세 차례에 걸친 도전에도 정상을 허락하지 않다가 1954년 아르디토 데지오 대장이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에 정상을 내준다.이탈리아 아브루치 공이 등정을 시도한 지 45년 만의 일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첫 등정의 영예를 얻으려고 국고로 막대한 비용을 보조했다.대규모 원정대는 40여 일의 악전고투 끝에 등정에 성공했다.
산의 특이한 이름은 ‘카라코람 2호기’라는 측량 기호에서 비롯됐다.인도 주재 영국 측량국은 1856년 산 높이를 재면서 카라코람의 산들은 편의상 K1,K2,K3 등의 측량 기호를 붙여서 사용했다.
산의 원래 이름은 ‘초고리(Chogori)’이며 ‘높고 거대한 산’이라는 뜻이다.‘하늘의 절대 군주’,‘죽음을 부르는 산’으로도 불렸다.
영국인들은 1856년 이 산의 발견자인 공병 장교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몽고메리’라고 부르기도 했다.1861년 산의 접근로를 처음 찾아낸 영국 등산가의 이름을 활용해 ‘마운드 고드윈 오스틴’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세계 2위의 고봉이라는 간결한 의미와 결합한 ‘K2’가 널리 사용된다.
◇초오유(Cho Oyu,8천201m)
티베트어로 ‘터키옥의 여신’이라는 뜻이다.보석과 같이 기품이 있고 아름다운 여신이 사는 산이라는 의미다.네팔 히말라야 쿰부 산군의 서쪽에 자리 잡았다.
오스트리아의 소규모 원정대가 1954년 처음 올랐다.헤르베르트 티히가 꾸린 검소한 원정대가 1톤 미만의 장비와 물량을 갖고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이들은 7,000m 지점에 4캠프를 설치하고 나서 제트 기류를 만나 1캠프까지 철수하기도 했다.식량이 부족하고 동상까지 걸렸지만 다시 등정에 나서 정상에 올랐다.
티히의 등정은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포스트 몬순’기에 이뤄졌다.
이 산의 등반사는 다른 고봉에 비해 초라한 편이다.1952년 영국의 에릭 십튼이 이끈 원정대가 처음 이 산에 도전했으나 다음해에 도전할 에베레스트 등반을 대비하는 시험무대였을 뿐이었다.
◇마칼루(Makalu,8천463m)
이 산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1년부터다.영국의 1차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촬영해 온 기록 사진 속의 위용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이 산에 등정하려고 산악인이 몰려든 것은 1954년부터였다.뉴질랜드,미국,프랑스 등 3개국 원정대가 정상 정복을 시도했다.
윌리엄 시리가 이끄는 미국 원정대와 에베레스트 첫 등정의 영웅 힐러리가 이끄는 뉴질랜드 원정대는 온 힘을 다했으나 희생만 안은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 가을에는 프랑코가 이끄는 프랑스 정찰대가 나타났다.이들은 다음해 봄 원정에 대비해 약 20일동안 주위 6천m급 봉우리 8개와 7천797m의 초모렌초를 등정했다.
다음해인 1955년 프랑코 원정대는 장 꾸지와 리오넬 테레이를 앞세워 3일 연속으로 대원 7명이 모두 등정하는 쾌거를 일궜다.치밀한 계획,훌륭한 장비,우수한 대원,한 해 전의 사전답사 등을 통한 고소 적응 훈련 덕분이었다.
세계 5위의 산이며 네팔 히말라야 쿰부 산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원래 이름은 티베트어로 ‘마하칼라(Maha-kala)’이며 ‘큰 기상(氣象)’이라는 뜻이다.
◇칸첸중가(Kangchenjunga,8천586m)
동부 히말라야의 칸첸중가는 산군의 제왕이다.네팔,시킴,티베트를 잇는 삼각지대에 있다.
남봉(8천491m),중앙봉(8천475m),주봉(8천586m),서봉(8천505m),동봉(7천903m) 등 5개의 높은 봉으로 이뤄졌다.5개 봉우리 가운데 4개 봉이 세계 5위의 마칼루보다 더 높다.티베트어로 ‘거대한 눈(雪)으로 이뤄진 다섯 개의 보고(寶庫)’라는 뜻이다.
인도의 피서지로 유명한 다질링에서 직선거리로 50㎞ 정도 떨어져 있다.문명권에서 가까운 산이라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졌다.에베레스트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봉으로 알려졌다.
처음 답사한 사람은 영국의 알파인 클럽 회장인 프리시필드 더글러스다.1899년 이 일대를 답사하고 ‘칸첸중가 일주’라는 답사기를 써서 소개했다.
1905년 영국,스위스,이탈리아 3개국 합동 등반대를 시작으로 영국 등 4개국 합동대,독일 등반대 등이 계속 도전했으나 실패가 거듭했다.마침내 1955년 찰스 에반스가 이끄는 영국 등반대가 첫 등정에 성공한다.
등정 첫날 밴드와 브라운에 이어 다음날에는 하디와 스트리더가 정상에 올랐지만 모두 정상에서 몇 발자국 남겨 놓고 발걸음을 멈춘 일화는 유명하다.신성한 정상을 밟지 않겠다는 주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이 약속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켜졌다.
다만 이 산은 오은선 대장의 2009년 등정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오 대장의 칸첸중가 정상 등정을 증명할만한 사진이 없고,셰르파들이 오 대장의 정상 정복에 관해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
◇마나슬루(Manaslu,8천163m)
14좌 가운데 8위다.네팔 히말라야의 마나슬루 산군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지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마나사(Manasa)’다.‘영혼’이라는 뜻이다.
1950년 영국 틸만이 이끄는 탐사대가 처음 발길을 남겼다.이후 일본이 1952년부터 해마다 정찰대와 원정대를 파견했다.일본은 당시 2차 세계대전 패배로 위축된 위상을 만회하려고 국가적으로 등정을 후원했다.
1차 원정대는 1953년 7천750m에 도달하는 성과를 일궜다.하지만 다음해에는 현지 원주민의 반대로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일본인 원정대가 성스러운 마나슬루를 침범했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는 이유다.원주민은 신의 노여움을 사서 천연두가 유행하고 흉년이 들었으며 오래된 절이 눈사태에 휩쓸려 승려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1956년 마키유코가 이끄는 3차 원정대가 편성됐다.대원 12명,셰르파 20명,포터 396명의 대규모 원정대였다.
이들은 눈사태로 파괴된 사찰 재건비의 일부를 부담하고 나서야 등반을 허락받았다.이마니시와 셰르파 겔젠이 6캠프를 출발해 4시간 후 정상에 섰다.
두 사람은 정상에서 1시간 가량 머물며 16㎜ 카메라로 주변 풍광을 촬영하기도 했다.이 영상은 8천m 정상에서 찍은 세계 최초의 영상 기록이 됐다.
이틀 후 하게타와 가토가 다시 등정에 성공했다.이후 일본은 히말라야 등반 대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로체(Lhotse,8천516m)
이 산은 에베레스트 바로 옆에 있으며 능선으로 연결됐다.로체라는 이름은 티베트어로 ‘남봉(南峰)’을 의미한다.에베레스트 남쪽에 있는 봉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에베레스트에서 남쪽으로 3㎞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4위의 고봉임에도 비교적 늦게 도전이 시작된 것은 에베레스트의 위성봉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산은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을 기점으로 분리된 엄연한 독립봉이다.
첫 등정 도전은 1955년에 이뤄졌다.미국의 다이렌퍼스가 주도한 국제 원정대가 등반을 시도했다.두 번에 걸쳐 정상을 공격했지만 8천100m까지 오른 후 기상이 나빠져 등정에 실패했다.
1956년 스위스 원정대가 두 번째 도전에 나섰다.이 원정대는 로체와 에베레스트 등 두 산을 목표로 한 엘버트 에글러가 이끌었다.대원 12명,셰르파 22명,포터 350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로체를 먼저 등정한 후 에베레스트마저 오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7천870m 지점에 6캠프를 설치했고 에른스트 라이스와 프리츠 루이징거가 정상에 올랐다.
첫 목표를 달성한 이들은 에베레스트로 자리를 옮겨 에베레스트 사상 두 번째 등정을 이룩한다.로체 등정 후 5일 만에 일궈낸 일이다.
다음날 2차 공격조인 라이스와 군텐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는다.한 원정대가 한 시즌에 두 개의 8천m봉을 연속을 등정한 것은 당시 최초였다.당시 상황은 대장인 에글러가 책으로 남겼다.
◇가셔브룸 2봉(Gasherbrum Ⅱ,8천35m)
1956년까지는 어떤 원정대도 이 산을 오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1934년 스위스의 군터 다이렌 퍼스가 이 산의 남쪽을 답사하고 보고서를 남겼을 뿐이다.
1956년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이 보고서를 참고해 첫 등정을 이룩했다.남서능을 경유했다.
프리츠 모라베크가 이끄는 원정대는 8명의 대원으로 이뤄졌다.이들은 정상 부근에서 기상이 나빠져 서서 밤을 새웠고 다음날 모라베크 대장,라르히,빌렌파르트 대원이 정상에 섰다.
14위의 고봉으로 가셔브룸 산군에 포함됐다.가셔브룸이라는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티베트어로 ‘아름다운 산’ 또는 ‘빛나는 벽’을 뜻한다.
◇브로드 피크(Broad Peak,8천47m)
가셔브룸 산군에 있는 이 봉의 이름은 1892년 카라코람 일대를 처음으로 답사한 영국인 윌리엄 콘웨이가 지었다.산의 모양새가 알프스의 브라이트 호른과 비슷해서 같은 뜻의 영어로 이름을 붙였다.
첫 도전을 한 팀은 1954년 독일 원정대다.낭가파르밧 원정대장이었던 헤어리히 코퍼가 이끄는 원정대는 도전하기에 늦은 시기인 10월23일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등정에 나섰지만 7천200m 지점에서 포기했다.
마쿠스 슈무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1957년 다시 도전해서 성공했다.대원 4명이 포터의 힘을 빌리지 않고 6천950m 높이의 캠프까지 직접 장비를 옮겼다.
등반팀의 헤르만 불은 낭가파르밧에 이어 두 개의 8천m 고봉을 처음 등반하는 위업을 이뤘다.
이들은 등반 후 주위의 다른 산에도 도전했다.슈무크 대장과 빈터 슈텔러는 사보이 산군의 최고봉인 스킬브룸(7천420m)을,불과 쿠르트 디엠베르거는 초고리사(7천665m)를 등반한다.
하지만 불은 초고리사에서 추락사하는 비극을 당했다.당시 나이는 33세였다.
◇가셔브룸 1봉(GasherburmⅠ,8천68m)
세계 11위로 피라미드처럼 생겼다.숨어 있는 봉우리라는 뜻의 ‘히든 피크(Hidden Peak)’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1934년 군터 다이렌퍼스가 이끄는 국제원정대가 처음 등반을 시도했다.이들은 6천300m지점까지 등반한 후 발길을 돌렸다.
1936년 세고뉴가 지휘하는 프랑스 원정대가 두 번째로 정상 공략에 나섰다.프랑스로서는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이었다.다른 유럽 산악 선진국 중에서는 상당히 늦은 진출이었다.
프랑스는 7천m를 넘어선 것에 만족하고 철수했다.이후 1958년 미국 원정대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미국은 그동안 K2 등정을 세 차례 시도하는 등 고봉 등정에 많은 공을 들였으나 첫 등정 경쟁에서는 밀려나 있었다.
니콜라스 클린치가 이끄는 미국 원정대는 7월5일 새벽 4시 5캠프를 출발해 오후 3시 정상에 올랐다.셰닝과 카우프만이 강추위와 눈보라를 뚫고 전진해 성공을 일궜다.
◇다울라기리(Dhaulagiri,8천167m)
산스크리트어로 ‘다와라기리(Dhawalagiri)’이다.다와라는 흰색,기리는 산을 뜻한다.
14좌 가운데 13번째로 등정될 정도로 등반이 어려운 산으로 평가받는다.1950년 프랑스 원정대가 첫 도전에 나선 이래 10년 동안 5개국이 8번이나 도전했으며 1960년 스위스 원정대가 세 번의 도전 끝에 첫 등정했다.
애초 1950년 프랑스 원정대가 이 산을 노렸으나 정찰 결과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안나푸르나로 계획을 바꿨다.3년 후 스위스 원정대가 나선 후에야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다.
스위스 원정대는 7천700m까지 올랐다가 돌아섰고 1960년 스위스 3차 원정대가 결국 성공했다.
막스 아이젤린이 이끈 3차 원정대는 대원과 장비를 비행기로 5천877m지점까지 옮기면서 체력을 비축했다.대원 중 디엠베르거는 헤르만 불에 이어 두 개의 8천m봉 첫 등정자로 이름을 남겼다.
◇시샤팡마(Shisha Pangma,8천46m)
14좌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정상을 허락했다.14좌 가운데 높이는 13위다.
중앙 히말라야 북단 티베트 고원의 남서부에 자리 잡았다.티베트어로 ‘풀밭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또 산스크리트어로 ‘고사인탄(Gosainthan)’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성스러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1950년 미국 월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사진으로 처음 소개됐다.처음에는 높이가 8천13m로 알려졌으나 최근 8천46m로 수정됐다.
등정이 늦어진 이유는 산이 중국령 티베트 영토 안에 있기 때문이다.중국은 이 산의 첫 등정은 중국인이 해야 한다면서 외국 원정대는 일절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결국 중국 원정대는 1964년 아무런 경쟁자 없이 처음으로 정상을 차지한다.
중국은 1963년 가을부터 시샤팡마를 정찰하기 시작했다.산의 개요를 파악한 중국은 2차 정찰대를 보내 7천160m까지 진입했다.
1964년 195명의 대원으로 이뤄진 원정대가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195명 가운데 53명이 7천500m 이상까지 오른 경험이 있는 티베트인이었지만 대장 등 10명 만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연합뉴스
14좌는 네팔 정부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9년 히말라야 원정을 개방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1950년 프랑스가 인류 최초로 안나푸르나를 등정했고,이후 1964년까지 14년 동안 14좌를 먼저 오르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화보]오은선 대장,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성공
◇안나푸르나(Annapurna,8천91m)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산군에 있는 세계 10위의 고봉이다.산스크리스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1950년까지 누구도 탐사한 일이 없어서 지도 상의 공백지나 다름없었다.이 때문에 프랑스는 첫 등정 때 사전 정찰 없이 단 한 번의 시도로 정상에 올랐다.
프랑스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성공을 일궈낸 셈이다.이런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프랑스 원정대의 강력한 팀워크와 최신 장비 덕분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원정대는 모리스 에르조그가 대장을 맡았고 장 쿠지,루이 라슈날,리오넬 테레이,가스통 레뷔파 등 쟁쟁한 산악인으로 구성됐다.당시 최신 섬유인 나일론으로 만든 텐트와 경금속 소재인 두랄루민으로 만든 장비가 총동원됐다.
이들은 속공전법을 구사해 성공을 일궜다.하지만 에르조그 대장은 심각한 동상을 입은 탓에 하산 하고 나서 손과 발을 절단해야 했다.
에르조그는 나중에 등정기 ‘최초의 8천m 안나푸르나’를 펴낸다.이 책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산악 명저가 된다.
에르조그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에베레스트(Everest,8천848m)
네팔 히말라야에 속하며 네팔과 티베트 국경의 쿰부 히말라야에 자리 잡고 있다.최근 네팔에서는 이 산의 높이를 8천850m로 수정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이 산이 최고봉으로 발견된 지 100년 만에 등정이 이뤄졌다.1953년 영국의 9차 원정대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가 산악인의 숙원을 풀었다.영국의 원정은 1921년부터 32년 동안 9차례나 계속됐다.
영국은 1852년 인도를 통치할 때 삼각측량을 통해 이 산이 세계 최고봉임을 발견했다.티베트에서는 ‘세계의 여신’이라는 뜻의 ‘초모룽마(Chomolungma)’라 불리고 네팔에서는 ‘눈의 여신’이라는 뜻의 ‘사가르마타(Sagarmatha)’로 통한다.
영국은 측량 활동에 공이 컸던 측지학자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에베레스트’라고 새롭게 이름을 붙였다.이 때문에 최근에는 현지에서는 원래의 이름을 찾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존 헌트 대장은 명저 ‘악센트 오브 에베레스트(The Ascent of Everest)’를 남겼고,힐러리는 ‘나싱 벤처,나싱 윈(Nothing Venture,Nothing Win)’이라는 등반기를 썼다.
◇낭가파르밧(Nanga Parbat,8천126m)
국내에는 여성 산악인 고미영 씨가 지난해 7월 하산하다가 실족해 사망한 산으로 잘 알려졌다.
14좌 가운데 9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며 파키스탄 북동부와 인도 사이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히말라야 산맥 서쪽 끄트머리에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벌거숭이산’이라는 뜻이며,별칭은 ‘산의 왕’이라는 의미를 담은 ‘디아미르(Diamir)’다.
특히 까다로운 루트는 남동쪽의 루팔벽으로 오르는 코스다.루팔벽은 표고차가 무려 4천500m이며 세계 최장의 암벽으로 악명 높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 때문에 에베레스트 남서벽과 로체 남벽 등과 함께 가장 난도 높은 루트로 꼽힌다.1953년 헤르만 불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할 때까지 7회에 걸쳐 31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불은 대장의 퇴각 명령을 거부한 채 5캠프에서 표고차 1천220m를 혼자서 17시간 만에 등반해 정상에 섰다.하지만 하산할 때 산소결핍증 때문에 환각에 시달렸고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선 채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불은 현대적인 보조 기술 도구를 쓰지 않고 정상에 올랐기 때문에 ‘초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죽음을 넘나들던 이야기는 저서 ‘8천m의 위와 아래’에 담았다.
고미영 씨는 작년 디아미르 루트로 올라 등정에 성공했다.이 루트는 편마암으로 구성된 낭가파르밧의 서쪽 디아미르 계곡에서 정상으로 이어진다.
고 씨는 해발 6천200m 지점의 ‘칼날 능선’에서 실족했다.보통 하산할 때 산악대원들은 서로 로프에 몸을 묶는데 ‘칼날 능선’은 눈사태와 낙석이 많아 로프를 사용하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졌다.
낭가파르밧을 3차례 오른 산악인 엄홍길 씨는 1990년 루팔벽 루트로 등정을 시도했다가 포기했고 1992년에는 디아미르 루트로 정상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정상 부근에서 갑자기 눈이 많이 온 탓에 돌아섰고,동상에 걸려 엄지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다.엄 씨는 1999년 디아미르 루트에 다시 도전했고 결국 정상 등반에 성공했다.
◇K2(8천611m)
14좌 가운데 가장 등반이 어려운 산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세 차례에 걸친 도전에도 정상을 허락하지 않다가 1954년 아르디토 데지오 대장이 이끄는 이탈리아 원정대에 정상을 내준다.이탈리아 아브루치 공이 등정을 시도한 지 45년 만의 일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첫 등정의 영예를 얻으려고 국고로 막대한 비용을 보조했다.대규모 원정대는 40여 일의 악전고투 끝에 등정에 성공했다.
산의 특이한 이름은 ‘카라코람 2호기’라는 측량 기호에서 비롯됐다.인도 주재 영국 측량국은 1856년 산 높이를 재면서 카라코람의 산들은 편의상 K1,K2,K3 등의 측량 기호를 붙여서 사용했다.
산의 원래 이름은 ‘초고리(Chogori)’이며 ‘높고 거대한 산’이라는 뜻이다.‘하늘의 절대 군주’,‘죽음을 부르는 산’으로도 불렸다.
영국인들은 1856년 이 산의 발견자인 공병 장교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몽고메리’라고 부르기도 했다.1861년 산의 접근로를 처음 찾아낸 영국 등산가의 이름을 활용해 ‘마운드 고드윈 오스틴’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세계 2위의 고봉이라는 간결한 의미와 결합한 ‘K2’가 널리 사용된다.
◇초오유(Cho Oyu,8천201m)
티베트어로 ‘터키옥의 여신’이라는 뜻이다.보석과 같이 기품이 있고 아름다운 여신이 사는 산이라는 의미다.네팔 히말라야 쿰부 산군의 서쪽에 자리 잡았다.
오스트리아의 소규모 원정대가 1954년 처음 올랐다.헤르베르트 티히가 꾸린 검소한 원정대가 1톤 미만의 장비와 물량을 갖고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이들은 7,000m 지점에 4캠프를 설치하고 나서 제트 기류를 만나 1캠프까지 철수하기도 했다.식량이 부족하고 동상까지 걸렸지만 다시 등정에 나서 정상에 올랐다.
티히의 등정은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포스트 몬순’기에 이뤄졌다.
이 산의 등반사는 다른 고봉에 비해 초라한 편이다.1952년 영국의 에릭 십튼이 이끈 원정대가 처음 이 산에 도전했으나 다음해에 도전할 에베레스트 등반을 대비하는 시험무대였을 뿐이었다.
◇마칼루(Makalu,8천463m)
이 산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1년부터다.영국의 1차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촬영해 온 기록 사진 속의 위용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이 산에 등정하려고 산악인이 몰려든 것은 1954년부터였다.뉴질랜드,미국,프랑스 등 3개국 원정대가 정상 정복을 시도했다.
윌리엄 시리가 이끄는 미국 원정대와 에베레스트 첫 등정의 영웅 힐러리가 이끄는 뉴질랜드 원정대는 온 힘을 다했으나 희생만 안은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 가을에는 프랑코가 이끄는 프랑스 정찰대가 나타났다.이들은 다음해 봄 원정에 대비해 약 20일동안 주위 6천m급 봉우리 8개와 7천797m의 초모렌초를 등정했다.
다음해인 1955년 프랑코 원정대는 장 꾸지와 리오넬 테레이를 앞세워 3일 연속으로 대원 7명이 모두 등정하는 쾌거를 일궜다.치밀한 계획,훌륭한 장비,우수한 대원,한 해 전의 사전답사 등을 통한 고소 적응 훈련 덕분이었다.
세계 5위의 산이며 네팔 히말라야 쿰부 산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원래 이름은 티베트어로 ‘마하칼라(Maha-kala)’이며 ‘큰 기상(氣象)’이라는 뜻이다.
◇칸첸중가(Kangchenjunga,8천586m)
동부 히말라야의 칸첸중가는 산군의 제왕이다.네팔,시킴,티베트를 잇는 삼각지대에 있다.
남봉(8천491m),중앙봉(8천475m),주봉(8천586m),서봉(8천505m),동봉(7천903m) 등 5개의 높은 봉으로 이뤄졌다.5개 봉우리 가운데 4개 봉이 세계 5위의 마칼루보다 더 높다.티베트어로 ‘거대한 눈(雪)으로 이뤄진 다섯 개의 보고(寶庫)’라는 뜻이다.
인도의 피서지로 유명한 다질링에서 직선거리로 50㎞ 정도 떨어져 있다.문명권에서 가까운 산이라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졌다.에베레스트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봉으로 알려졌다.
처음 답사한 사람은 영국의 알파인 클럽 회장인 프리시필드 더글러스다.1899년 이 일대를 답사하고 ‘칸첸중가 일주’라는 답사기를 써서 소개했다.
1905년 영국,스위스,이탈리아 3개국 합동 등반대를 시작으로 영국 등 4개국 합동대,독일 등반대 등이 계속 도전했으나 실패가 거듭했다.마침내 1955년 찰스 에반스가 이끄는 영국 등반대가 첫 등정에 성공한다.
등정 첫날 밴드와 브라운에 이어 다음날에는 하디와 스트리더가 정상에 올랐지만 모두 정상에서 몇 발자국 남겨 놓고 발걸음을 멈춘 일화는 유명하다.신성한 정상을 밟지 않겠다는 주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이 약속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켜졌다.
다만 이 산은 오은선 대장의 2009년 등정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오 대장의 칸첸중가 정상 등정을 증명할만한 사진이 없고,셰르파들이 오 대장의 정상 정복에 관해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
◇마나슬루(Manaslu,8천163m)
14좌 가운데 8위다.네팔 히말라야의 마나슬루 산군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지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마나사(Manasa)’다.‘영혼’이라는 뜻이다.
1950년 영국 틸만이 이끄는 탐사대가 처음 발길을 남겼다.이후 일본이 1952년부터 해마다 정찰대와 원정대를 파견했다.일본은 당시 2차 세계대전 패배로 위축된 위상을 만회하려고 국가적으로 등정을 후원했다.
1차 원정대는 1953년 7천750m에 도달하는 성과를 일궜다.하지만 다음해에는 현지 원주민의 반대로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일본인 원정대가 성스러운 마나슬루를 침범했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는 이유다.원주민은 신의 노여움을 사서 천연두가 유행하고 흉년이 들었으며 오래된 절이 눈사태에 휩쓸려 승려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1956년 마키유코가 이끄는 3차 원정대가 편성됐다.대원 12명,셰르파 20명,포터 396명의 대규모 원정대였다.
이들은 눈사태로 파괴된 사찰 재건비의 일부를 부담하고 나서야 등반을 허락받았다.이마니시와 셰르파 겔젠이 6캠프를 출발해 4시간 후 정상에 섰다.
두 사람은 정상에서 1시간 가량 머물며 16㎜ 카메라로 주변 풍광을 촬영하기도 했다.이 영상은 8천m 정상에서 찍은 세계 최초의 영상 기록이 됐다.
이틀 후 하게타와 가토가 다시 등정에 성공했다.이후 일본은 히말라야 등반 대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로체(Lhotse,8천516m)
이 산은 에베레스트 바로 옆에 있으며 능선으로 연결됐다.로체라는 이름은 티베트어로 ‘남봉(南峰)’을 의미한다.에베레스트 남쪽에 있는 봉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에베레스트에서 남쪽으로 3㎞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4위의 고봉임에도 비교적 늦게 도전이 시작된 것은 에베레스트의 위성봉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산은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을 기점으로 분리된 엄연한 독립봉이다.
첫 등정 도전은 1955년에 이뤄졌다.미국의 다이렌퍼스가 주도한 국제 원정대가 등반을 시도했다.두 번에 걸쳐 정상을 공격했지만 8천100m까지 오른 후 기상이 나빠져 등정에 실패했다.
1956년 스위스 원정대가 두 번째 도전에 나섰다.이 원정대는 로체와 에베레스트 등 두 산을 목표로 한 엘버트 에글러가 이끌었다.대원 12명,셰르파 22명,포터 350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로체를 먼저 등정한 후 에베레스트마저 오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7천870m 지점에 6캠프를 설치했고 에른스트 라이스와 프리츠 루이징거가 정상에 올랐다.
첫 목표를 달성한 이들은 에베레스트로 자리를 옮겨 에베레스트 사상 두 번째 등정을 이룩한다.로체 등정 후 5일 만에 일궈낸 일이다.
다음날 2차 공격조인 라이스와 군텐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는다.한 원정대가 한 시즌에 두 개의 8천m봉을 연속을 등정한 것은 당시 최초였다.당시 상황은 대장인 에글러가 책으로 남겼다.
◇가셔브룸 2봉(Gasherbrum Ⅱ,8천35m)
1956년까지는 어떤 원정대도 이 산을 오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1934년 스위스의 군터 다이렌 퍼스가 이 산의 남쪽을 답사하고 보고서를 남겼을 뿐이다.
1956년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이 보고서를 참고해 첫 등정을 이룩했다.남서능을 경유했다.
프리츠 모라베크가 이끄는 원정대는 8명의 대원으로 이뤄졌다.이들은 정상 부근에서 기상이 나빠져 서서 밤을 새웠고 다음날 모라베크 대장,라르히,빌렌파르트 대원이 정상에 섰다.
14위의 고봉으로 가셔브룸 산군에 포함됐다.가셔브룸이라는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티베트어로 ‘아름다운 산’ 또는 ‘빛나는 벽’을 뜻한다.
◇브로드 피크(Broad Peak,8천47m)
가셔브룸 산군에 있는 이 봉의 이름은 1892년 카라코람 일대를 처음으로 답사한 영국인 윌리엄 콘웨이가 지었다.산의 모양새가 알프스의 브라이트 호른과 비슷해서 같은 뜻의 영어로 이름을 붙였다.
첫 도전을 한 팀은 1954년 독일 원정대다.낭가파르밧 원정대장이었던 헤어리히 코퍼가 이끄는 원정대는 도전하기에 늦은 시기인 10월23일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등정에 나섰지만 7천200m 지점에서 포기했다.
마쿠스 슈무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1957년 다시 도전해서 성공했다.대원 4명이 포터의 힘을 빌리지 않고 6천950m 높이의 캠프까지 직접 장비를 옮겼다.
등반팀의 헤르만 불은 낭가파르밧에 이어 두 개의 8천m 고봉을 처음 등반하는 위업을 이뤘다.
이들은 등반 후 주위의 다른 산에도 도전했다.슈무크 대장과 빈터 슈텔러는 사보이 산군의 최고봉인 스킬브룸(7천420m)을,불과 쿠르트 디엠베르거는 초고리사(7천665m)를 등반한다.
하지만 불은 초고리사에서 추락사하는 비극을 당했다.당시 나이는 33세였다.
◇가셔브룸 1봉(GasherburmⅠ,8천68m)
세계 11위로 피라미드처럼 생겼다.숨어 있는 봉우리라는 뜻의 ‘히든 피크(Hidden Peak)’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1934년 군터 다이렌퍼스가 이끄는 국제원정대가 처음 등반을 시도했다.이들은 6천300m지점까지 등반한 후 발길을 돌렸다.
1936년 세고뉴가 지휘하는 프랑스 원정대가 두 번째로 정상 공략에 나섰다.프랑스로서는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이었다.다른 유럽 산악 선진국 중에서는 상당히 늦은 진출이었다.
프랑스는 7천m를 넘어선 것에 만족하고 철수했다.이후 1958년 미국 원정대가 첫 등정에 성공했다.
미국은 그동안 K2 등정을 세 차례 시도하는 등 고봉 등정에 많은 공을 들였으나 첫 등정 경쟁에서는 밀려나 있었다.
니콜라스 클린치가 이끄는 미국 원정대는 7월5일 새벽 4시 5캠프를 출발해 오후 3시 정상에 올랐다.셰닝과 카우프만이 강추위와 눈보라를 뚫고 전진해 성공을 일궜다.
◇다울라기리(Dhaulagiri,8천167m)
산스크리트어로 ‘다와라기리(Dhawalagiri)’이다.다와라는 흰색,기리는 산을 뜻한다.
14좌 가운데 13번째로 등정될 정도로 등반이 어려운 산으로 평가받는다.1950년 프랑스 원정대가 첫 도전에 나선 이래 10년 동안 5개국이 8번이나 도전했으며 1960년 스위스 원정대가 세 번의 도전 끝에 첫 등정했다.
애초 1950년 프랑스 원정대가 이 산을 노렸으나 정찰 결과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안나푸르나로 계획을 바꿨다.3년 후 스위스 원정대가 나선 후에야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됐다.
스위스 원정대는 7천700m까지 올랐다가 돌아섰고 1960년 스위스 3차 원정대가 결국 성공했다.
막스 아이젤린이 이끈 3차 원정대는 대원과 장비를 비행기로 5천877m지점까지 옮기면서 체력을 비축했다.대원 중 디엠베르거는 헤르만 불에 이어 두 개의 8천m봉 첫 등정자로 이름을 남겼다.
◇시샤팡마(Shisha Pangma,8천46m)
14좌 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정상을 허락했다.14좌 가운데 높이는 13위다.
중앙 히말라야 북단 티베트 고원의 남서부에 자리 잡았다.티베트어로 ‘풀밭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다.
또 산스크리트어로 ‘고사인탄(Gosainthan)’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성스러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1950년 미국 월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사진으로 처음 소개됐다.처음에는 높이가 8천13m로 알려졌으나 최근 8천46m로 수정됐다.
등정이 늦어진 이유는 산이 중국령 티베트 영토 안에 있기 때문이다.중국은 이 산의 첫 등정은 중국인이 해야 한다면서 외국 원정대는 일절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결국 중국 원정대는 1964년 아무런 경쟁자 없이 처음으로 정상을 차지한다.
중국은 1963년 가을부터 시샤팡마를 정찰하기 시작했다.산의 개요를 파악한 중국은 2차 정찰대를 보내 7천160m까지 진입했다.
1964년 195명의 대원으로 이뤄진 원정대가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195명 가운데 53명이 7천500m 이상까지 오른 경험이 있는 티베트인이었지만 대장 등 10명 만이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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