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 기업대출 외면하고 손쉬운 가계대출 집중

은행들 기업대출 외면하고 손쉬운 가계대출 집중

입력 2015-01-04 10:28
수정 2015-01-0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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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들이 일은 고되고 책임은 큰 기업여신업무 맡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직무연수 때 아예 여신심사 과정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4일 국내 주요 시중은행의 한 직원은 최근 은행권에서 생긴 풍조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개인 여신은 담보대출이 대부분이고, 신용대출이라고 하더라도 큰 규모가 아니라서 위험 부담이 적다”면서 “기업대출은 큰 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예금이나 개인대출보다 규모가 훨씬 커 자칫 업무 처리를 잘못하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은행권, 잇단 대출사기로 위축된 기업대출을 가계대출로 만회

금융당국은 KT ENS와 모뉴엘 사건 등 지난해 잇달아 터진 은행권의 기업 부실대출 사건에 대한 검사를 끝내고, 올해 초 관련자들에 대한 무더기 징계를 예고했다.

잇단 대형 대출사기 사건은 은행권의 기업 여신 규모를 크게 위축시키고 있다.

지난해 정부는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걸고 ‘기술금융’을 적극적으로 해달라고 금융기관들에 주문했다.

기술금융은 금융기관이 신용등급 위주의 대출 방식에서 벗어나 우수한 아이디어나 기술에 대한 평가를 근거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의 시책에 따라 은행마다 ‘중소기업대출 강화’를 외쳤지만, 지난해 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외환은행 등 6대 시중은행의 자영업자 대출을 제외한 중소기업대출 증가액은 고작 4조3천억원에 머물렀다.

2013년 말 153조5천억원에서 지난해 말 157조8천억원으로 늘어 증가율은 2.8%에 그쳤다.

대기업대출은 2013년 말 98조5천억원에서 지난해 말 100조4천억원으로 2.0% 늘어나 증가율이 중소기업대출에도 못 미쳤다.

특히 기업금융의 강자라고 불리는 우리은행의 중소기업대출 잔액이 2013년 말 34조8천549억원에서 지난해 34조5천269억원으로 3천280억원 줄었다.

또 같은 기간에 우리은행의 대기업대출 잔액은 18조8천460억원에서 19조3천261억원으로 2.55% 증가하는데 그쳤다.

반면, 우리은행의 전세대출은 지난해 말 3조7천337억원으로 2013년 말보다 72.6% 늘어나 6개 시중은행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우리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증가율은 15.2%로, 시중은행 중 가장 높다.

국민은행도 지난해 말 중소기업·대기업대출 잔액이 전년보다 각각 4.91%, 0.25% 줄었다.

이에 반해, 국민은행의 작년 말 전세대출과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전년 같은 시기보다 각각 66.6%, 11.4% 늘어나 우리은행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증가율을 나타냈다.

시중은행의 한 기업담당 부행장은 “지난해 은행권이 잇따라 기업 대출사기에 연루되면서 리스크가 큰 기업 여신이 많이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기업대출의 부진을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손쉬운 가계대출로 만회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 장기적 안목으로 기업여신 심사능력 키워야”

지난해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주요 은행들은 KT라는 대기업의 이름과 모뉴엘의 조작된 명성만 보고 엄격한 신용평가, 현장방문, 꼼꼼한 서류심사 없이 선뜻 큰돈을 내줬다.

KT ENS는 거대통신기업 KT의 자회사다. 모뉴엘은 수출대금 액수나 물량을 허위로 가공하는 수법으로 국내에서 대표적인 혁신 가전업체로 이미지를 꾸미고, 2007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가전전시회(CES)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자사의 상품을 칭찬했다며 이를 크게 부풀려 홍보에 이용하기도 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현재 기업 대출의 가장 큰 문제는 국내 은행이 여신심사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라면서 “정부의 독려로 대부분 대출이 형식적이거나 성공 가능성이 확인된 업체에만 대출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은행이 금융 위험이 큰 중소기업 대출에 대해서는 대기업처럼 정량적인 재무 데이터만을 보고 건전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특수성이 있다.

김 교수는 “중소기업 대출은 은행과 업체 간에 오랜 기간 거래관계에서 축적되는 정성적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현재 국내 금융시장은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이런 관계형 금융 기법을 발전시킬만한 유인 자체가 없다”고 지적했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은행이 담보를 제공할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의 신기술이나 특허권 등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는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라며 “은행이 의지를 갖추고 관련 인력, 역량, 경험을 확충하려는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조 연구위원은 “정부나 감독당국에서 금융기관에 일종의 압박이나 하향식으로 중소기업 대출 비중을 높이려고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늘어난 은행권 대출액이 주택담보·전세자금·신용·자영업자 대출 등 가계대출 부문에 편중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은행 본연의 책무인 기업금융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조 교수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 한국경제의 가장 심각한 위험요소는 가계부채”라면서 “가계대출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 부동산거래를 위한 대출이라기보다 자영업자들이 긴급 운영자금을 확충하려고 부동산을 담보로 받은 가계대출 형태인데, 이런 자영업자의 몰락을 부추길 수 있는 위험요소가 더 커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은행권의 수익 구조가 가계대출에 편중된 점은 지나치게 주식거래 수수료 수입에 의존하다가 지난해 결국 위기를 맞은 증권업계와 비슷하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조영무 연구위원은 “지난해 주가가 크게 하락하자 주식거래 수수료 수입 비중이 지나치게 높았던 증권업계의 업황이 나빠지면서 위기가 찾아왔다”면서 “은행이 단순 영업 형태의 예대마진 의존하며 수익 구조마저 획일화·단일화되어 있으면 지난해 증권업에서 나타났던 위기가 은행권에서도 재현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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