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富가 죄는 아니다] ④ 英 윤리적 화장품 기업 ‘러쉬’
“기업의 윤리적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고객에게 잘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믿는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돼야 합니다. 매력적인 제품을 제공하는 동시에 소비 행위에 자긍심을 부여하면 고객은 스스로 찾아오게 돼 있지요.” 지난 4월 26일 영국 남부 도싯주의 항구도시 풀에 있는 ‘러쉬’ 1호점에서 만난 공동창업자 로웨나 버드(59·여)와 윤리 담당자 사이먼 콘스탄틴(37)은 입을 모아 “투명성과 일관성이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열쇠”라고 거듭 강조했다.영국의 화장품 전문 브랜드 러쉬는 천연 재료를 사용하고 광고나 과대 포장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업체로 잘 알려져 있다. 각각의 제품마다 제작한 담당자의 이름과 얼굴 그림이 부착된 ‘상품 제작 실명제’로도 유명하다. 1995년 풀 지방의 작은 화장품 회사로 출발해 지난해 기준 전 세계 50여개국에 932개 매장을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무리한 팜야자 경작으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열대우림이 훼손되면서 서식지를 잃은 오랑우탄. 러쉬는 지난해 11월 유럽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열대우림 복원을 지원하는 ‘SOS수마트라’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러쉬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팜유를 전혀 함유하지 않은 ‘SOS 수마트라’ 샴푸바를 출시하고, 판매수익금 전액을 수마트라 생태계 복원 기금으로 사용한다고 밝혔다.
러쉬 제공
러쉬 제공
영국 남부 도싯주 풀 지방에 있는 ‘러쉬’ 1호점. 1995년 창업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러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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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고객들이 일상적인 구매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캠페인도 시행하고 있다. ‘블랙팟 재활용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러쉬의 검은색 플라스틱 화장품 용기인 블랙팟 5개를 모아서 매장에 가져온 고객에게는 마스크팩 정품 1개를 증정해 자연스럽게 ‘착한 소비’를 유도하는 활동이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모아진 화장품 용기는 100% 재활용돼 새로운 블랙팟으로 재탄생한다. 러쉬의 제품 용기가 검은색인 이유도 검은색 플라스틱이 유일하게 재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러쉬의 브랜드 이미지가 형성되고 홍보도 이뤄진다. 특히 과거와 같은 기업의 일방향적 홍보보다 온라인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소비자의 자발적인 입소문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는 최근에는 러쉬의 이러한 활동이 단순히 윤리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경제적 효용의 측면에서도 유의미하다는 분석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이고도 효과적으로 브랜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효과는 수치로도 입증됐다. 지난해 회계연도(2016년 7월~2017년 6월) 기준 러쉬의 글로벌 매출은 9억 4143만 파운드(약 1조 3463억원)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9.3% 성장했다. 2016년에도 7억 2812만 파운드(약 1조 412억원)로 전년 대비 25.5% 성장하는 등 꾸준히 두 자릿수의 성장세를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로웨나와 사이먼은 러쉬의 사회적 활동이 브랜드 이미지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마케팅 수단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러쉬 창립 초기부터 마케팅에 예산을 쏟는 대신 품질 개발과 윤리 활동에 더 많은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고, 이 같은 지향점이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고객 확보라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러쉬는 자사의 각종 사회공헌 활동을 지칭할 때 일반적인 기업 용어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윤리적 실행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이먼은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업이 하는 CSR 활동이 CSR 전담 부서에서의 업무일 뿐 기업의 경영활동과는 별개로 움직이는 것과 달리 윤리적 실행력은 기업의 전 부서에서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라는 것이 차이”라고 설명했다. 러쉬가 진행하는 캠페인 등 대외적 활동뿐 아니라 원료를 수급하고 상품을 생산해 판매하는 모든 과정이 ‘윤리적 실행력’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사이먼 콘스탄틴 러쉬 윤리담당자
사이먼은 “많은 기업들이 마케팅에는 돈을 쏟아부으면서 윤리적 활동을 하는 데에는 인색하다”면서 “윤리적 활동을 ‘부수적인 숙제’로 인식하는 순간 비용만 지출할 뿐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비경제적 활동이 되고 만다. 반면 자기가 진정 옳다고 믿는 가치에 투자하면 소비자들 스스로가 진심을 알아봐 주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러쉬는 몇 년 전 자신들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전 세계 화장품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중국 시장 진출을 포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입 화장품이 현지에서 판매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물 실험을 거쳐야 한다는 중국의 규정을 따를 수 없었던 까닭이다.
로웨나 버드 러쉬 공동창업자
풀(영국) 글 사진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2018-06-11 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