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4세…45세부터 25년간 ‘안정·내실’로 LG그룹 이끌어
구자경 LG 명예회장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
LG그룹은 “유족들이 온전히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별도의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며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장례 일정도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했음을 양해 바란다”고 밝혔다.
구 명예회장의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이 지난해 별세했을 때도 소탈하고 겸손하게 살아온 고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 비공개 가족장을 치르겠다고 밝힌 바 있다.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LG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45세 때인 1970년부터 LG그룹 2대 회장을 지냈다.
진주사범을 졸업한 고인은 부산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그룹의 모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1969년 구인회 창업회장의 별세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1970년 LG그룹 회장을 맡아 25년간 그룹 총수를 지냈다. 1987∼1989년 사이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했다.
검정 뿔테안경에 경상도 사투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구 명예회장은 안정과 내실을 중시하는 경영스타일로 유명했다.
고인이 이끌던 LG는 ‘보수적인 기업’의 대명사로 불렸고, 대기업의 부침이 심했던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특혜나 이권과 관련해 잡음을 일으킨 사례가 거의 없는 편으로 전해진다.
1970년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그룹은 럭키와 금성사, 호남정유 등 8개사에 연간 매출이 270억원이었다.
취임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 때 범한해상화재보험과 국제증권, 부산투자금융, 한국중공업 군포공장, 한국광업제련 등을 인수했고 럭키석유화학(1978년), 금성반도체(1979년), 금성일렉트론(1989년) 등을 설립하는 등 외형을 불렸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21세기를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인재들이 그룹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며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을 넘겨줬다.
고인이 경영에서 물러날 당시 LG는 30여개 계열사에 매출액 38조원의 재계 3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구 명예회장은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고자 연구개발을 통한 신기술 확보에 주력해 회장 재임 기간에 설립한 국내외 연구소만 70여개에 이른다.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유럽, 미주 지역에 LG전자와 LG화학의 해외공장 건설을 추진해 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의 권한을 이양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자율경영체제’를 그룹에 확립했다.
고인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육 활동과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에 관여해 왔다.
또한, 충남 천안에 있는 천안연암대학 인근 농장에 머물면서 된장과 청국장, 만두 등 전통음식의 맛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구 명예회장은 슬하에 지난해 타계한 구본무 LG 회장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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