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談餘談] 붉은 손가락/백민경 사회부 기자

[女談餘談] 붉은 손가락/백민경 사회부 기자

입력 2010-09-11 00:00
수정 2010-09-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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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경 사회부 기자
백민경 사회부 기자
중학생 아들이 어린 소녀를 살해한다. 아들을 위해, 자신을 위해 중년의 가장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한다. 그는 치매에 걸린 노모를 범인으로 내세우는데….

일본 추리소설의 대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붉은 손가락’의 내용이다. 반전이 놀랍다. 바로 노모는 치매에 걸린 적이 없다는…. 아들 내외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노모가 말문을 닫은 채 바보 흉내를 내며 자식과의 갈등을 원천 차단했던 것.

노모는 자신을 살인자로 만들려는 아들의 계획을 알아채고 뭔가를 준비한다. ‘붉은 손가락’이다. 손자의 범행 당일, 치매 연기를 하며 손에 묻혔던 립스틱을 장갑으로 계속 가리고 다녔던 것. 거동이 불편한 노모는 딸을 시켜 립스틱을 집 밖에 맡겨둔다. 시체에 붉은 립스틱 자국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점과 립스틱이 범행 이후 집안에 없었으니 새로 발랐을 리가 없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체포 직전 노모는 장갑을 벗는다. 아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지나친 자식 사랑이 빚은 파국이었다. 최근 언론에 대서특필된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이 오버랩된다.

그는 ‘고위 공직자’라는 신분을 이용, 딸을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정부 부처에 두 번이나 특별 채용했다. 심지어 자격이 모자란 딸을 위해 응시요건과 일정 등 채용 기준까지 바꿨다. 결국 특혜를 준 사실 때문에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을 뒤로하고 씁쓸하게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소설 속 범죄만큼 극단적 상황은 아니지만 비뚤어진 자식사랑이 최소한의 상식조차 마비시켜 버렸다는 점은 같다. 그의 섣부른 판단은 수년간 고시에 매달리던 많은 이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행안부는 아예 행시 특채 확대계획을 백지화했다.

어쩌면 유 전 장관은 딸만 보였는지도 모른다. 피땀 흘려 고시에 매달리고 있는 힘없는 국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아무 말도 못하는 ‘치매 걸린 노모’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이제 알지 않았을까. 소통이 안돼 잠자코 있을 뿐 국민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결정적인 순간 진실을 알릴 ‘붉은 손가락’을 들이밀 수도 있다는 사실을.

white@seoul.co.kr
2010-09-1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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