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규 사회2부 차장
A는 제3공화국 말기 내무부장관을 거쳐 1987년 정계에 입문, 신민주공화당과 민자당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부총재 등을 두루 지냈던 고위층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와 같은 반에서 공부한 적이 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품행과 행동거지가 늘 전교생과 선생님들의 입과 귀를 바쁘게 했던 것만은 생생하다.
A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도 안하무인이었다. 잘못한 일을 나무라는 선생님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물론 선생님들의 꾸지람도 시늉에 그쳤던 게 어린 눈에도 확연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덩치가 컸던 A는 2학년이 되자 늘 옆에 두 명의 친구를 데리고 다녔다. 이른바 ‘꼬붕’들이었다. 그 둘은 방과 후 학교 문을 나설 때면 A의 가방을 건네받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 대가는 학교 앞 옥수동의 제법 번듯한 중국집에서 파는 짜장면 한 그릇이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흐르고, 시대도 바뀌었다. 권력이란 것을, 그 자식들이 흉내내는 건 물론이요, 친인척들이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우쭐대는 그런 시대가 있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작은 권력자’를 자처하던 A와 같은 경우는 지금이라면 정말 큰일 날 일이다. 공직자라는 말이 우리의 귀에 익기 훨씬 이전에 한때 서울시장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절 3~4대 시장 이기붕을 시작으로 제6공화국 때까지 서울시장은 국가 최고권력자와 직·간접적으로 통했다. 힘과 총칼을 앞세워 백성을 몰아붙이던 독재시절, 서울시장은 이 나라의 2인자를 자임하고 또 그 특혜를 진하게 누린 자리였다.
그런 암흑의 시대와는 분명 다를 테지만,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은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꽤 묵직하게 받아들여진다. 지금 당장 2인자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1인자의 자리를 향해 나갈 기회를 얻고 발판을 닦고 숨을 고르는 자리라는 까닭에서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승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선 당시 한양을 다스리던 한성판윤의 자리를 반드시 거치는 것이 정도였다.
그 직분도 지금 못지않게 중요해 한성판윤만 잘 뜯어봐도 나라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의정 버금가는 실세를 누린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당파 간 암투가 무척이나 심했다. 나라 안팎으로 정세가 들끓었던 구한말인 1890년 고종 27년에는 한 해에 25명의 판윤이 바뀌는 바람에 ‘반나절 판윤’이란 말까지 나왔다.
이제 일주일 남짓 뒤면 제34대 서울시장이 우리 앞에 나서게 된다. 후보 4명 가운데 1명이겠지만, 사실상 결과는 한나라당과 통합야당 후보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해질 것이 뻔하다.
전 시장이 이런저런 이유로 임기 도중 물러나는 바람에 치르는 보궐선거인 터라 민망하기도 하지만, 이 선거가 또 결국 이 나라 집권당-비집권당 간의 대결구도가 됐다는 게 영 입맛이 씁쓸하다.
평범한 민초들이 당파와 정치를 논하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에게 선거라는 건 그저, 고단한 우리네 삶의 주름을 조금이라도 펴기 위해 누군가를 대표로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뽑힌 그 대표는 대표답게 일해 줘야 한다는 게 그들의 순진한 요구다.
선거에 나선 이의 머릿속에 이 단순한 명제가 각인돼 있다면 지금처럼 여당과 야당, 고소와 맞고소, 흑색선전 따위의 단어는 지금 귀에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바라는 서울시장은 권력을 시음해 보기 위해, 또 차기 대권후보가 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아니다. 진심으로 서울과 시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그런 우리의 대표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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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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