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
21세기로 접어든 지금, 새로운 국가경영의 화두는 무엇인가? 21세기의 가치 역시 그 이전 세기인 20세기의 경제력이라는 가치를 한층 더 성숙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문화가 21세기의 새로운 국가경영의 가치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한 국가의 경제력이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삶의 질 문제이다. 양적 확충에 대한 관심이 질적 성숙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문화는 삶에 대한 이러한 관심축의 이동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이다. 문화상품이 산업생산품보다 고부가가치의 재화라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힘’과 ‘돈’보다 ‘문화’가 국가경쟁력의 새로운 척도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문화의 시대를 맞아 문화강국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문화강국이 될 수 있을까? 세계에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춘, 우리만이 가진 ‘고유성’이다. 서양의 것으로 우리가 최고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근래 필자가 근무하는 한국국학진흥원과 서울 예술의 전당이 전시분야 교류협약을 맺는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보려 한다. 예술의 전당 관계자들이 그들의 기관보다 훨씬 오지에 있는 기관과 교류협약을 맺으러 안동까지 내려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서양 것만으로는 세계적인 공연·전시 기관으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보유한 수많은 선현들의 기록문화에 담겨 있는 우리 고유의 스토리텔링적 요소들이 공연이나 전시에 녹아 들어가야 세계일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현들의 참가치를 더 많은 이들이 향유할 수 있기에 우리 기관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최근 한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한류 열풍의 1세대인 드라마가 해외로 뻗어갈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일까? 거기에는 한국적 정서와 문화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드라마 ‘대장금’이 수많은 세계인의 이목과 흥미를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역경 극복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동서고금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플롯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의 정성을 다하는 음식문화가 첨가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거세게 불고 있는 K팝의 해외 열기도 지속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 젊은이와 중년여성들의 열광과 심금을 자아내는 지금의 한류바람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거기에 좀 더 고품격의 한국적인 무엇이 담겨야 한다.
그러면 좀 더 고품격의 ‘한국적인 무엇’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향기가 누대에 걸쳐 스며 있는 자취인 ‘전통문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전통은 계승·발전시킬 가치가 있는 것만이 이어져 내려간다. 전통이 담긴 문화는 이래서 소중한 것이다. 겸손과 배려, 공경과 헌신의 정신이 물씬 풍기는 고품격의 전통문화가 전국 방방곡곡에 수없이 묻혀 있다. 이러한 문화는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 고유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곧 고품격으로 살아간 선현들의 삶의 향기에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과 상통한다. 요컨대 문화는 곧 ‘사람’에 대한 재발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바야흐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시대를 넘어 휴먼웨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이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 우리가 21세기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이다.
2011-12-0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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