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목 전 코이카 이사장
지난주 미국 폭스미디어그룹이 폭스뉴스를 제외한 전 자산을 디즈니에 넘기기로 합의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루퍼트 머독 회장이 세운 제국이 정점에서 문을 닫는 것이냐는 질문에 머독 회장은 “아니다. 지금은 ‘파괴의 시대’다. 나는 지금이 축을 옮겨갈 시점으로 본다”고 답했다고 한다. 콘텐츠는 디즈니에 넘기고 머독 제국은 미디어 사업에 재투자와 혁신을 가해 폭스뉴스를 새로운 미디어 강자로 만들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특히 시선을 끈 것은 파괴의 시대라는 말이다. 정보통신기술(ICT)과 경영 분야에서 쓰이는 ‘디지털 파괴’라는 개념에서 파괴는 새로운 기술과 비지니스 모델로 기존의 사업과 자산이 불가피하게 훼손될 때 이를 극복하는 혁신 과정을 의미한다. 파괴라는 단어에는 ‘판 흔들기’, ‘새 판 만들기’라는 뜻이 결합돼있는 셈이다. 4차 산업혁명이 기술 문명의 발전을 역사적 단계로 구분한 개념이라면 ‘판 흔들기’라는 개념은 현재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기술적 충격과 현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가상화폐는 중앙은행만이 통화의 가치와 태환성을 보장해온 기존의 화폐 체제와 통상적 종이 화폐 개념을 뒤흔드는 교란이다. 미래세대가 과연 종이 화폐에 의존한 거래 체계를 유지할까. 중앙은행은 디지털화된 지불 수단을 계속 무시하고 사이버 공간에만 놔두고 있을까. 이미 다른 나라의 일부 상업은행과 투자기관은 디지털 화폐로 국경 밖 결제를 시행하고 일부 국가 중앙은행은 디지털 화폐를 창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도 있다.
가상화폐에 대한 평가와 정책은 국가적 검토 대상이지 민간이 함부로 의견을 낼 것은 아니다. 다만 민간에서는 가상화폐 관련 기술인 블록체인 기술의 필요성 등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거래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지게 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기존 디지털 체계에 대한 교란자라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 기술이 가상화폐뿐 아니라 에너지, 유통, 농업, 운송, 무역 및 대형 프로젝트 관리 분야까지 응용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국제 개발 분야에서도 혁신적인 전문가들은 금융 소외계층의 해소, 기후변화 대응처럼 다양한 이해 관계가 얽힌 복잡한 프로젝트에 블록체인 기술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에너지 공급과 소비가 체계화 되지 않은 개발도상국이나 국토가 큰 나라에서는 ‘태양광 마을’ 같은 독립적인 작은 단위의 에너지 생산·소비체계가 효율적이다. 이런 체계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디지털 분야의 파괴는 혁신의 원동력이다. 혁신은 효율을 높이고 편의를 제공해 ?의 질을 높이며 또 불평등의 해소에도 기여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대장 플랫폼’이 ‘꼬마 플랫폼’을 흡수한다. 큰 놈은 더 커지고 작은 놈은 생존이 어렵다. 이런 현상은 국가 간 관계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그러나 보다 독립적인 블록을 효율적으로 작동시켜주는 블록체인 기술은 어떻게 목표를 가져가느냐에 따라 이런 현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파괴와 혁신이 일어나는 디지털 혁명 시대의 과제는 그 혁신이 더 나은 삶과 공동체적 가치를 지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IT강국, 지식기반 경제라고 자찬하던 대한민국은 남보다 앞서 지배적 허브를 만드는 데는 번번이 실기했던 것 같다. 우리는 과연 디지털 혁명 시대에 앞장서 모범을 보일 수 있을까.
2017-12-2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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