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와 매시, 장어 젤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 에프 쿠크(F.Cooke) 주인 조지프 쿠크가 파이앤드매시를 접시에 담고 있다.
민스파이와 으깬 감자 그리고 장어 젤리 요리는 오랫동안 런던 이스트엔드에 살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한 끼였다.
장어 젤리라고 해서 장어 맛이 나는 달콤한 젤리를 상상하면 곤란하다. 디저트가 아니라 식사다. 조리법은 간단하다. 토막 낸 장어를 향신료를 넣은 물에 삶은 후 그대로 식히면 끝이다. 젤라틴 성분이 장어에 함유돼 있어 식으면 육수가 젤리처럼 굳는다. 오래 끓인 사골 곰탕이나 삼계탕을 냉장고에 넣으면 벌어지는 현상과 같은 원리다. 장어 젤리는 보통 차가운 채로 먹지만 동네와 취향에 따라 따뜻하게 데우기도 한다.
장어 젤리와 함께 영국 노동자들의 든든한 끼니로 사랑받았던 민스파이와 으깬 감자.
장어 젤리의 탄생에는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강에 흔한 민물장어는 내륙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식재료였다. 물에서 건져 올려도 쉬이 죽지 않아 운송과 보관이 용이해 신선한 상태로 먹을 수 있었다. 장어가 보양식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담백한 살코기 맛에 매료돼 중세 왕과 귀족 그리고 수도원의 식탁에 자주 올랐다.
중세의 유럽은 음식의 성질로 건강을 다스릴 수 있다는 이른바 4체액론이 지배했다. 모든 음식은 뜨겁고 차갑거나 습하고 건조한 4가지 성질을 갖고, 우리 몸 또한 이들 성질과 조화를 잘 이뤄야 건강한 상태라고 여긴 것이다. 장어를 비롯한 생선은 차갑고 습한 것으로 간주됐으니 불에 굽고, 튀기는 조리법이 생선 요리에 적합했다. 13세기 신학자이자 의사, 과학자였던 알렉산더 네컴은 생선은 뜨겁고 건조한 성질의 와인과 물에 삶아 녹색의 허브 소스에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장어 젤리와 함께 세트로 나오는 민스파이와 매시트포테이토에 녹색 파슬리 소스를 끼얹어 먹는 방식의 연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과 바다에 넘쳐났던 장어는 대구와 함께 18세기 중반 굶주린 도시 노동자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량자원이었다. 처음에는 장어 파이의 형태로 길거리 노점에서 판매됐다. 식은 장어 파이의 속은 젤라틴이 굳어 젤리처럼 됐다. 먹는 입장에서는 한 손으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내용물이 흘러내리지 않아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템스강이 오염되고 장어 개체수가 급감하자 장어 가격은 점점 높아졌다. 2차 대전 후 장어 공급이 줄자 장어 파이는 다진 소고기를 넣은 민스파이로 바뀌었고 장어는 젤리 형태로 따로 판매됐지만 한동안 여전히 노동자들의 고단함을 달래 주는 인기 음식으로 통했다.
장준우 셰프 겸 칼럼니스트
장어 젤리가 맛이 없어서 사라지는 것이라는 예상은 금물. 종종 영국의 기괴한 음식으로 소개되지만 이상하지 않다. 조리법이 단순해 장어 본래의 맛과 향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비린내도 거의 없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매운 고추를 식초에 절인 소스를 뿌려 먹으면 훨씬 맛이 다채로워진다. 젤리처럼 굳은 육수는 비록 질감은 익숙하지 않지만 가만히 음미해 보니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장어 지리탕 맛이다. 맛이 정말 좋다는 말은 쉬이 나오지 않지만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맛 같은 건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하다.
2019-11-28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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