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시간이 좀 걸려서 나온 해장국의 뜨거운 국물이 참 시원하고 개운했다. 개운하면서도 깊은 맛.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깊은 맛도 있었다. 국물을 후후 불며 정신없이 먹다가 TV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아주머니가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 눈치 같기도 했고, 내 얼굴에 뭐가 묻어서 말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아니면 혹시 이른 아침부터 해장국을 먹으러 온 사연이 궁금해서였을까?
예상과 달리 아주머니는 아주 침까지 삼키며 목울대를 꿀꺽하더니 “아이고, 참말로 맛있게 드시네요” 하는 게 아닌가. 얼굴 가득 부처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음식 하나는 정말 맛있게 먹는다는 소리를 자주 듣긴 했지만 근래 들어 본 적 없는 따스한 말이었다. 그래 나도 씩 웃으며 “아따~ 참말 맛있네요. 이런 데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자주 왔을 텐데 말입니다” 하고 기분 좋게 답을 해드렸다. 밥을 말지 않고, 밥 한 숟가락 국물 한 숟가락 하면서, 밥그릇 비워지는 줄 모르고 먹다가 보니 일찌감치 그릇은 바닥이 나 버렸다. 그릇 바닥에 조금 붙은 밥을 긁어 국물에 마는데 채 한 숟가락도 되지 않았다. 입맛을 다시며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머니가 밥 한 공기를 가지고 와서 “아이고, 내가 적게 담은 밥을 드렸네요” 하면서 슬쩍 내밀었다. 객지 밥을 많이 먹은 나는 눈치가 9단이다. 그냥 한 그릇 더 주며 선심 쓰듯 생색내는 말을 해도 될 텐데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자책하면서 더 주는 아주머니의 밥 한 공기.
식사를 마치고 카드 대신 만 원짜리 한 장을 드렸다. 1000원을 거슬러 줘야 하는데 아주머니께서는 3000원을 거슬러 줬다. 맛있게 먹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밥 한 그릇 더 공짜로 얻어먹는 건 도리가 아니다 싶어 2000원을 도로 드렸더니 “너무 맛있게 먹는 게 보기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추가 밥값은 안 받을 게요.” “아이고, 이러시면 제가 미안하잖아요. 받아 두세요.” 돈을 내밀어도 한사코 거절하는 거였다.
“호호 내가 이걸 안 받아야 손님이 다음에 또 오죠.” 푸핫, 그러니까 아주머니 말씀은 이미 미래에 대한 이득도 계산했다는 것이었다. 인심만 쓰는 것으로 보이면 내가 미안해할까 싶어 미래 이득도 다 계산해서 하는 일이니 맘 편하게 가라는 얘기였다. 2000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깊은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인심을 쓰면서도 상대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는 아주머니의 지혜로운 말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예수님께서 보낸 말씀이 아닌가 싶었다. 손님을 다시 오게 만들면서도 인심과 배려에 인색하지 않는 아주머니의 지혜가 새삼스럽게 따스하게 느껴졌다. 따스한 지혜, 정이 담긴 지혜란 그런 것일까. 글에는 글을 쓴 사람이 들어 있고, 음식에는 음식을 만든 사람이 들어 있다. 아주머니의 말씀에는 아주머니의 인정과 배려와 지혜가 깃들어 있었다.
산타클로스는 때로 말씀을 타고 오시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이야기 중에도 따스한 이야기가 이 세계 무게의 90%를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머지 10%는 돈이 차지하고 있다. 그 10%가 세계를 아프게 한다. 그래도 끝까지 따스한 이야기를 들고 10%의 돈과 싸워야 하지 않겠나 싶다. 이길 때까지. 해장국집 아주머니는 따스한 말씀, 따스한 이야기를 선물해 주신 산타였다.
2019-12-2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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