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록삼 논설위원
게다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저항하며, 준연동형비례대표제를 무력화시키고 역행시키기 위한 시도는 집요하기만 하다. ‘비례○○당’과 같은 위성정당인지 괴뢰정당인지를 설립하겠다는 자유한국당의 1차 꼼수는 지난 13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괴뢰(傀儡)라 함은 형식상으로는 독립적이나 실질적으로는 다른 단체에 종속돼 그의 말을 따르는 단체나 정권을 말한다. 하지만 선관위 제동에도 불구하고 ‘미래한국당’이라는 이름의 창당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1년 넘는 동안 파행 끝에 나타난 해프닝만으로 여기기에는 뒷맛이 너무 씁쓸하다.
민주주의는 인류의 과제이자 지향점이다. 하지만 법과 제도 만으로는 이렇듯 허망하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는 1987년 체제 이후 오랫동안 겪어 왔다. 진짜 제도의 완성은 주권을 가진 시민의 몫이다. 온갖 저항 속에 어렵사리 미흡하게나마 만들어진 제도다. 이조차 희화화하고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시민이 나서서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참여하고, 감시하고, 심판해야 한다.
4·15 총선이 세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각 정당이 비례대표 순번을 정해야 하는 절차가 남았다. 정당정치의 문화가 부재하다시피 한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진행될까. 공천 절차에 한창인 정당마다 크고 작은 잡음이 들려온다. 비례대표 일부는 나름의 기준으로 전략공천을 하고, 나머지는 공정성에 의문을 남기는 여론조사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정의당이 과거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 방식처럼 비례대표 선발에 개방형국민경선을 실시한다고 밝혔지만 시간의 한계, 제도의 미비 등으로 인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정당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을 싸잡아 욕하는 것은 당장은 통쾌할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시민들의 역할이 될 수 없다. 투표에 적극 참여해 누군가를 지지하고, 누군가를 심판하는 역할 역시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요체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당 참여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서 정당의 의사결정 과정에 의견을 개진하고 논의에 참여하며, 정당의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시민들의 삶에 굳게 뿌리를 내리는 정당이 탄생할 수 있다. 흔히 지방자치를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진짜 풀뿌리 민주주의는 꼭 지방자치가 아니라도 시민의 구체적인 참여와 실천만 있으면 정당에서도 구현할 수 있다. 정당정치 참여는 연동형비례대표제 활용법 중 하나다.
이와 함께 연동형비례대표제의 또 다른 활용법이 있다. 다수의 노동자, 농민, 서민, 청년들은 아주 오랫동안 부자와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곤 했다. 그렇게 계급 배반 투표를 해오다가 아예 정치 냉소로 돌아서버린 것은 그들 탓이 아니었다. 자신의 계급과 계층, 삶에 기반한 구체적인 요구를 담아낼 정당과 국회의원이 없었던 탓이다. 예컨대 청년 실업 문제를 실천적으로 고민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는 가칭 ‘청년당’이 있거나, 농민기본소득과 생태농업에 대한 담론을 실천하는 ‘농민당’이 있거나, 도시 서민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는 ‘도시빈민당’이 있다면 어땠을까. 과거에는 제도권 진입이 어려웠겠으나, 연동형비례대표제가 도입된 마당에는 이제 승산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목표를 가진 정당이 탄생하고, 이들 정당에서 시민들이 당원 활동을 하고, 연동형비례대표제가 시작된 만큼 특수목적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해 민생과 관련된 법안을 만드는 현실을 얼마든 꿈꿀 수 있다. 이는 정치 문화의 근본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거대 양당 중심의 획일적 가치 혹은 삶과 유리된 정치가 아닌, 다양성을 보장하는 연대의 정치 말이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그때 비로소 시작된다.
youngtan@seoul.co.kr
2020-01-24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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