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난민들의 ‘진짜’ 가족 만들기

스리랑카 내전으로 가족을 잃은 ‘시바다산’은 프랑스로 망명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디판’은 그가 프랑스 생활과 함께 갖게 된 이름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시바다산은 이제 낯선 거리에서 2유로짜리 조명 머리띠와 열쇠고리 등을 파는 디판으로 살아가게 된다. 컴컴한 어둠 속에 총천연색 불빛이 희미하게 깜박이다가 장난감 머리띠가 되고, 그것을 머리에 끼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디판’이라는 제목이 겹쳐지는 장면은 이 영화가 시바다산이 디판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비단 환경이나 직업 등 물리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 감정적인 부분으로 나아가는데 하루아침에 신분이 달라진 것과 달리 이러한 변화는 서서히 이뤄진다.



망명을 위해 급조한 가짜 아내(얄리니)와 딸(일라얄)은 디판에게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요인이면서 함께 변화를 겪어 나가는 주체들이기도 하다. 각자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외로움, 불안으로 피폐해진 영혼을 혼자 끌어안은 채 아슬아슬한 동거를 계속하던 그들은 시나브로 서로에게 적응하며 마음을 열어 나간다. 영화는 가족 ‘행세’를 하던 그들이 아내와 남편, 부모와 딸 역할을 하며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유머와 위트를 곁들인 이들의 변화 과정은 갈등과 폭력이 난무하는 외부 세계와 대비되며 더 큰 울림을 준다. 칸 영화제가 ‘디판’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먼저 영화의 소재가 가진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전의 피해나 난민에 대한 차별 등 사회적 이슈를 많이 비워내고 그 자리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채워 넣는다. 이처럼 이질적인 영역을 조화시키는 드라마와 함께 때로 이미지보다 인상적으로 사용되는 사운드와 음악,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결말부까지 ‘디판’은 다양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예언자’(2009), ‘러스트 앤 본’(2012) 등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을 묘사해 왔던 자크 오디아르가 난민들에게 시선을 멈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폭력을 피해 국경을 넘어야만 했던 수많은 난민들은 유럽인들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들이다. 오디아르는 ‘디판’을 통해 이들 대다수가 겪고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고단한 삶과 불안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얄리니 역을 맡은 칼리스와리 스리니바산의 폭넓은 감정 연기도 훌륭하지만 디판 역의 안토니타산 제수타산은 실제로 스리랑카 반군으로 활동하다가 프랑스에 정착한 인물로,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스크린 위에 재현해 냈다. 그의 눈빛과 표정은 다른 배우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통렬한 세월을 담고 있다. 그에게 전쟁의 상흔과 망명 당시의 혼란스러움을 되살려 내야 한다는 부담과 두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그에 맞선 용기와 도전이 오디아르의 힘 있는 연출 스타일과 잘 어우러져 디판이라는 인물을, ‘디판’이라는 영화를 완성시켰다. 22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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