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처럼 中의 대외개방 권고 수용 제스처””北, 1991년 10월과 2011년 5월후 개방조치들 유사”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지난달 방중에서 눈길을 끈 대목은 단연 양저우(揚州) 방문이었다.우선 20일 새벽 투먼(圖們)에 도착해 무단장(牧丹江)-하얼빈(哈爾濱)-창춘(長春)을 거치면서 예상을 깨고 이틀 밤을 특별열차에서 지새운 김 위원장이 2천여㎞를 달려 양저우에 간 배경에 궁금증이 일었다.
아울러 이틀 밤을 양저우 영빈관에 머물면서도 외부로 드러난 행적은 양저우 시내 한장개발구 방문과 영빈관 건너편에 대형 매장에 들른 게 전부였던 점도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김 위원장은 도대체 왜, 무엇때문에 양저우에 갔는 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까닭이다.
’쉬운’ 추론은 이미 제기됐다.
양저우는 지난 1991년 10월 난징(南京)에서 김일성 주석과 장쩌민(江澤民) 당시 주석 간에 정상회담 후 김 주석이 장 주석의 안내로 찾은 곳으로, 김 주석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북한측 주요 인사들이 많이 찾는 명소인 탓에 김 위원장 역시 부친을 추모하는 차원에서 그 곳을 찾았다는 얘기였다.
아울러 양저우가 장쩌민 전 주석의 고향이고, 장 전 주석이 과거에 외국의 주요 인사를 더러 그 곳으로 초청했다는 점에서, 그의 초청으로 김 위원장이 방문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는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에 거부감을 갖는 제4세대 지도부의 정점인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상하이방의 최고 리더로 여전한 ‘현실권력’인 장쩌민 전 주석 간에 갈등설이 자리잡고 있다. 김 위원장이 북한 권력승계에 대한 중국 현 지도부의 공개적인 지지를 압박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양저우에 있는 장쩌민을 방문했다는 ‘해설’도 곁들여진다.
그러나 아무리 북한과 중국이 ‘특수’ 관계라고 하더라도, 후진타오 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 김정일 위원장이 초청 취지를 거스르면서 장쩌민 전 주석을 만나러 양저우로 가는 외교적 ‘결례’를 했다는 분석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양저우가 부친의 흔적을 찾으러 양저우를 찾았다는 설명은 너무 ‘단순하다’는 평가다.
여기에 김정일 위원장이 양저우에 갔을 당시 장쩌민 전 주석을 ‘목격했다’는 진술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북중 양국의 두 전현직이 만났다면 김 위원장이 양저우에 도착당일인 지난달 22일과 이틀째인 23일 만찬 자리일 가능성이 크고, 이를 통해 장쩌민 목격담이 나올 법 하지만 중국 내 인터넷에도 그런 글은 없다.
실제 아이디(ID) ‘메이런제제(美人姐姐.미인언니)’라는 필명의 네티즌이 자신이 양저우 영빈관에서 김 위원장 일행을 상대로 공연한 둥팡(東方)가무단 소속이라면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공연 무대와 만찬장 모습을 담은 사진을 웨이보에 올렸지만, 여기에도 장쩌민 전 주석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와 더불어 중국 당국이 장쩌민 전 주석의 김 위원장 회동설에 ‘부정적인’ 입장을 비치는 점도 김 위원장의 양저우 행적에 ‘장쩌민 부재(不在)’ 가능성을 높인다.
그렇다면 김정일 위원장이 ‘무리’를 강행하면서 양저우에 간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1991년 10월 양저우 방문후 북한이 잇따라 내놓은 유화적인 대내외 메시지와 김정일 위원장의 양저우행 간의 ‘함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은 방중 복귀 직후인 1991년 10월 12일 노동당 정치국 전원회의를 열어 나진ㆍ선봉 특구설치(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채택(1991년 12월), 핵사찰 수용(1992년 2월) 등의 조치를 내놓았는데, 김정일 위원장 복귀 직후 북한의 ‘제스처’가 이와 유사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 북한은 지난 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황금평과 위화도를 특구로 지정, 개발할 것이라고 신속하게 발표했다. 8일과 9일에는 각각 황금평 개발과 북한 라진항-중국 훈춘(琿春) 간 도로 보수공사 착공식을 열었다. 적어도 이는 ‘북한식’ 대외개방 의지라는 해석이 나온다.
현재로선 북한이 앞으로 어떤 조치를 내놓을 지 예측이 어렵지만, 적어도 경제개발에 초점을 맞춘 ‘유화 행보’를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1991년 10월의 풍경은 이렇게 묘사된다. 우선 한ㆍ중 수교(1992년)를 ‘결심’한 덩샤오핑(鄧小平)이 그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개혁개방, 남북관계 개선, 핵문제 해결을 통한 대미관계 개선이라는 전략적 결단을 압박하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초청한다. 그러나 막상 그 얘기를 들은 김 주석은 큰 충격을 받는다. 적어도 한중 수교를 북미, 북일 수교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 미뤄달라고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덩샤오핑은 양국 관계를 기존의 ‘혈맹’에서 정상적 국가관계로, 양국간 교역도 중국의 일방적 대북지원에서 경화결제 방식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통보한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김일성 주석이 장쩌민 주석의 안내로 양저우로 향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뇌의 시간’을 가진 김 주석은 그러고서 귀국해 일부 대외 개방이라는 ‘통 큰 결단’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그와 비교해 2011년 5월은 김정일 위원장이 특별열차로 중국 대륙을 6천㎞를 남북종단하는 ‘특유의’ 전달법으로 중국의 대외개방 권고를 수용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무단장-양저우를 오가며 부친의 발자취를 찾는 방법으로 북ㆍ중 혁명세대간 유대의 상징성까지 활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또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방중을 통해 긴밀한 북중 경제밀착 행보를 보임으로써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중국카드’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비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북한은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어느 한쪽에 전적으로 경도되지 않는 ‘의존의 균형’을 유지해왔으나, 근래 몇년새 한ㆍ미ㆍ일 3국의 일치된 압박이 지속되자 중국과 밀착하는 전략적 선택을 했고, 김정일 위원장 방중 이후의 북중 행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제사회는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이 최근 며칠새 “남한과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주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북중 긴밀화라는 경제행보와는 달리, 남한과는 대립각을 세우면서 나름대로 남한 고립전략을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특히 북한이 ‘남북 비핵화 회담→북미회담→6자회담 재개’라는 3단계 접근안을 거부하고서, 남북 회담을 생략한 채 중국의 지원을 뒤에 업고 북미회담으로 가로질러 북핵 6자회담 재개로 가는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1991년 10월 방중후 ‘진정으로’ 중국의 개혁개방 ‘권고’를 받아들이는 척 하다가 1993년초부터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핵비확산조약(NPT) 조약 탈퇴를 선언한 것처럼 갑작스레 ‘유턴’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적어도 현재 북한이 보이는 유화적 대외개방 제스처가 언제 급변할 지는 모른다는 지적이다.
이를 두고 북한의 최근 행보는 대외개방에 방점이 찍혀 있기보다는 직면한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북중 밀착으로 경제적 실리를 확보해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 체제를 확고히 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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