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후야오방에 ‘최고 찬사’…‘과오’ 언급조차 안해

시진핑, 후야오방에 ‘최고 찬사’…‘과오’ 언급조차 안해

입력 2015-11-21 02:40
업데이트 2015-11-21 02:56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용감한 혁명전사·개혁개방 개척자…역사책에 길이 빛날 공헌” 후진타오 체제서 시작된 복권작업 완료…사후 26년 만의 ‘반전’시진핑 부친과의 인연도 영향준 듯’톈안먼 재평가’ 가능성도 제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일 중국 현대사에서 ‘비운의 총서기’로 불려온 후야오방(胡耀邦·1915∼1989)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대해 “역사책에 길이 빛날 공헌”을 남겼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이날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최로 열린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 기념좌담회’ 연설에서 “오늘 우리는 (후야오방을) 추앙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장엄하게 모였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후야오방을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가, 걸출한 정치공작자’, ‘용감하게 투쟁한 혁명전사’, ‘개혁개방의 개척자’로 부르며 중화민족의 독립과 해방,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위해 위대한 공헌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시 주석은 “후야오방 동지는 한 생을 당과 인민에게 바쳤다”며 “주야로 공무를 수행하며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온 힘을 다했다”고 거듭 극찬했다.

후야오방은 개혁개방 초기인 1980년대 초중반에 다소 급진적인 자유화 조치를 시도하고 학생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보수파의 공격을 받다가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축출됐다.

당시 당 지도부는 후야오방에 대해 “정신적으로 오염됐고 자산 계급 자유화에 반대하는 당을 배척했다. ‘전반서화’(全盤西化·서양 문화 전체를 받아들이려는 사조)에 대한 요구를 용인하고, 학생운동 발생을 야기했다”는 결정을 내렸다.

‘자산 계급 자유화’를 용인했다는 것은 공산주의를 배반했다는 뜻이다.

그의 사망(1989년 4월 15일)은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사후에도 “당을 배척했다”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그는 같은 공청단 계열인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체제가 들어선 2000년 대에 들어서야 서서히 명예회복이 이뤄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공식 복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 총서기인 시 주석이 당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전원 참석한 이날 기념식에서 공개적으로 후야오방의 삶을 극찬하는 연설을 함에 따라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시절부터 추진돼온 ‘비운의 총서기’에 대한 복권작업은 완료됐다.

시 주석은 특히 후야오방이 덩샤오핑의 핵심이론인 ‘해방사상’(解放思想),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강조했다는 점을 수차례 거론하며 두 인물이 추구한 길이 결국은 같은 선상에 있었다는 점을 부각하기도 했다.

시 주석이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후야오방을 공식 복권한 것은 중국의 정치, 경제체제가 그만큼 탄력적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공고한 권력 기반이 이번 행보로 다시 한 번 입증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후야오방과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전 국무원 부총리의 인연도 그의 결단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관측된다.

시중쉰은 중국의 경제특구인 선전(深천<土+川>)을 설계한 인물로, 후야오방이 경질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변호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시 주석이 지금도 중국 내에서 ’최대의 금기‘로 통하는 톈안먼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복권한 것은 결과적으로 톈안먼 사건에 대한 재평가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온다.

중국 정부는 오랫동안 톈안먼 사건을 ’동난‘, ’폭란‘ 등으로 지칭해왔지만, 근년 들어서는 ’정치적 풍파‘라는 다소 순화된 듯한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시 주석이 취임 직후 ’서구식 입헌 민주주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권‘, ’언론의 독립과 시민사회에 대한 서구식 개념' 등 7가지를 체제에 대한 도전 요소로 규정한 것으로 알려진 만큼, 톈안먼 사건 재평가는 아직은 요원한 일이라는 관측이 많다.

연합뉴스
많이 본 뉴스
공무원 인기 시들해진 까닭은? 
한때 ‘신의 직장’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공무원의 인기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9급 공채 경쟁률은 21.8대1로 3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공무원 인기가 하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낮은 임금
경직된 조직 문화
민원인 횡포
높은 업무 강도
미흡한 성과 보상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