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브레니차 8000여명 학살 25년이 흘렀지만 여전한 생채기

스레브레니차 8000여명 학살 25년이 흘렀지만 여전한 생채기

임병선 기자
입력 2020-07-11 16:27
수정 2020-07-1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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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한 여인이 스레브레니차 학살 25주기인 11일 근처 포토차리의 희생자 유역을 찾아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포토차리 로이터 연합뉴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한 여인이 스레브레니차 학살 25주기인 11일 근처 포토차리의 희생자 유역을 찾아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다.
포토차리 로이터 연합뉴스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겁니다. 걱정들 마세요.”

정확히 25년 전인 1995년 7월 11일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부대의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는 스레브레니차 마을을 떠나려는 무슬림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경무장한 유엔 평화유지군 병력이 안전지역이라고 선포하고 주변에 있었던 것도 무슬림 주민들이 마음을 놓은 이유였다.

그 뒤 세르비아군은 열흘 동안 성인 남성과 소년들 8000명 이상을 살육했다. 평화유지군은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민간인 학살로 최대 규모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스레브레니차의 비극은 유엔 역사를 내내 괴롭힐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 옛 유고 연방을 이끌었던 강력한 지도자 티토가 사망한 뒤 여러 갈래의 분쟁과 내전이 잇따랐는데 그 중 보스니아 내전 와중에 일어났던 참극이 이 마을의 살육극이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보스니아계 무슬림, 정교회를 신봉하는 세르비아,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국민투표를 거쳐 1992년 독립을 선포해 곧바로 미국과 유럽 정부들의 승인을 받았지만 국민투표를 보이콧한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새 정부를 공격해 내전이 시작됐다. 대 세르비아 깃발 아래 보스니아계를 몰아내겠다는 이른바 인종청소가 저질러졌다.

세르비아 부대는 1992년 이 마을을 점령했다가 곧바로 보스니아 군대에 내줬다. 그 뒤 줄곧대치하며 교전을 벌였다. 이듬해 4월 유엔 안보리는 이 지역을 안전지대로 선포해 어떤 무장공격이나 적대 행위도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대치는 이어졌다. 민간인들에 대한 보급이 막히기 시작했고 네덜란드 국적 평화유지군 병사들이 적은 병력이나마 주둔하고 있었다. 보스니아 주민들 사이에 굶어죽는 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5년 7월 세르비아 군이 다시 스레브레니차를 공격했다. 유엔군은 퇴각해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공습이 이어졌다. 도움의 손길은 미치지 않았다.

포위 닷새 뒤에 믈라디치는 개선하듯 다른 장군들과 함께 마을에 걸어 들어갔다. 이미 2만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네덜란드군 기지로 피신한 뒤였다. 다음날부터 살육이 시작됐다. 무슬림 난민들이 피난 가려고 탄 버스들을 에워싼 뒤 남성과 소년들을 골라 세운 뒤 총으로 쏴죽였다. 수천명이 처형당했고 불도저로 흙을 파낸 뒤 묻어버렸다. 일부는 산 채로 생매장 됐고 일부 어른들은 아이들이 숨져가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8000여명의 보스니아 무슬림 남성과 소년들이 무참히 학살된 25주기를 하루 앞둔 10일 스레브레니차에서 가까운 포토차리 마을에서 새롭게 발굴된 9구의 시신을 담은 관들 옆에 무슬림들이 모여 이제라도 안식할 것을 기원하고 있다. 포토차리 AP 연합뉴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8000여명의 보스니아 무슬림 남성과 소년들이 무참히 학살된 25주기를 하루 앞둔 10일 스레브레니차에서 가까운 포토차리 마을에서 새롭게 발굴된 9구의 시신을 담은 관들 옆에 무슬림들이 모여 이제라도 안식할 것을 기원하고 있다.
포토차리 AP 연합뉴스
여성들과 소녀들은 피난 줄 밖으로 나오라고 해 강간했다. 거리에는 시신들로 그득했다.

네덜란드 군인들은 5500명의 무슬림 피난민을 내주고 세르비아인들의 잔학한 행동을 팔짱낀 채 바라봤다. 무장이 미약했다지만 너무 비겁한 일이었다.

헤이그 전범재판소는 세르비아인들이 살육을 행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믈라디치를 전범으로 유죄 판결한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군대에 갈 만한 아이들과 남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치밀한 작업이 진행됐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탄 버스들을 체계적으로 수색해 남자를 찾아냈다. 때로는 군대에 갈수도 없는 어린 소년들과 나이 든 남성들까지 처형했다. 25년이 흐른 지금도 새로운 유해들이 이 마을 근처에서는 파헤쳐지고 있다.

2002년 네덜란드 정부와 군 간부들이 살육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것을 지적하는 보고서가 발간됐다. 이 보고서 여파로 내각 전체가 물러났다. 지난해 네덜란드 대법원은 스레브레니차의 350명 죽음에 네덜란드가 부분적 책임이 있다는 판결에 대한 항소를 기각했다.

2017년 헤이그 전범재판소는 믈라디치를 학살과 다른 잔학행위들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는 1995년 내전 종결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가 2011년 세르비아 북부 사촌 집에서 발각돼 체포됐다. 세르비아 정부는 그 뒤 전범 행위에 대해 사과했지만 대량 학살이 저질러졌다는 점을 여전히 부인하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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