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아들이었다”

“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아들이었다”

입력 2012-10-11 00:00
수정 2012-10-1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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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일 박사 주장

강원 철원 명성산에는 ‘비운의 왕’ 궁예의 전설이 여기저기에 서려 있다. 부하였던 왕건에게 쫓기게 된 궁예가 이곳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크게 울었으며, 산 이름이 ‘울음산’, 즉 명성산(鳴聲山)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미륵불을 자처하며 사회 변혁을 꿈꿨던 궁예. 후삼국 시대 견훤, 왕건과 각축을 벌였던 궁예의 출신에 대해서는 몰락한 진골 귀족의 후예,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의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왕 헌안왕(재위 857-860) 또는 제48대 왕 경문왕(재위 861-875)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전남대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인 송은일 박사는 연구논문 ‘궁예의 출자(出自)에 대한 재론’에서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송 박사는 ‘삼국사기’ 등 사료를 토대로 궁예의 출신과 가문을 추적했다.

그는 궁예가 태어나자마자 나라에 해를 끼칠 인물로 낙인찍혀 왕으로부터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주목했다.

’삼국사기’에는 “왕은 중사(中使)를 시켜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송 박사는 왕의 명령을 받고 궁예를 죽이러 간 ‘중사’는 중사성(中使省)의 관리로, 중사성이란 관부가 존재한 시기는 경문왕 즉위 초기였다면서 “궁예를 죽이려 했던 왕은 경문왕이었고 그러므로 경문왕은 궁예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고 분석했다.

당시 신라의 왕족들이 재상 등 주요 관직을 독점해 왕권을 강화했던 점에 비춰볼 때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아들을 왕이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게 송 박사의 분석이다.

그는 “경문왕의 혼인 과정과 가족 사항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서도 궁예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혐의는 드러나지 않았다”면서 “결국 궁예는 헌안왕의 아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결론내렸다.

헌안왕은 조카인 제46대 문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문성왕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헌안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계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중 계명의 지원 때문이었다.

송 박사는 “계명이 헌안왕의 왕위계승을 지원한 것은 다음 왕위를 자신에게 물려주겠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헌안왕은 즉위 후 계명과의 합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직계로 왕통을 이으려 했고 지방 진골 귀족 김인문 가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 궁예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논문은 13일 전남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발표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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