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전쟁·허위의식 다룬 산문집 ‘못 가본 길이… ’ 출간
“6·25가 난 해도 경인년이었으니 꽃다운 20세에 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아남아 그해가 회갑을 맞는 것까지 봤으니 내 나이가 새삼 징그럽다.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소설가 박완서씨가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 펴냄)를 출간했다. 책과 같은 제목의 산문에서 작가는 올해 등단 40주년과 함께 팔순이 된 나이를 ‘징그럽다.’고 밝혔다. 작가에게는 팔순이라는 나이보다 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된 해라는 것이 더 와닿는 듯하다.
그는 전쟁에 대해 “6·25의 경험이 없었으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 경험을 줄기차게 우려먹었고, 앞으로도 할 말이 얼마든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고 고백했다. 또 ‘영원한 현역 소설가’로서 “내가 소설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소설가인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마치 허세를 부린 것처럼 뒷맛이 허전해지곤 한다.”고도 했다.
작가와 ‘국민화가’ 박수근이 미군 매점인 PX에서 함께 근무한 것은 그의 데뷔 소설 ‘나목’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PX에서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따오는 영업을 하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결혼했던 작가는 남들이 다 알아주는 팔자 좋은 결혼생활이 문득문득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속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겉만 빌려 입은 비단옷으로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처럼 자신이 한없이 뻔뻔스럽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가슴의 통증으로 비명을 삼킬 때도 있었고, 어디 남 안 듣는 곳에 가서 실컷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이 뭉쳐 병이 될 것 같은 적도 있었다.”
전쟁의 상처, 중산층 여성의 허위의식, 노인의 사랑 등 다양한 주제를 솔직하면서도 정의로운 시각으로 입심 좋게 풀어놓았던 작가의 산문은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이번 산문집은 2007년 펴낸 ‘호미’ 이후 쓴 글들을 묶은 것이다. 글쓰기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박완서씨는 “팔자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이 마흔에 소설가로 데뷔해 성공한 작가는 여전히 많은 문청(문학 청년)들에게 희망임을 산문집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2010-07-3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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