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구디의 역사인류학 강의】잭 구디 지음 산책자 펴냄
“그 빌어먹을 인류학 프로젝트를 하려는 것이라면 내 앞에서 당장 꺼지시오.”아메리카 원주민인 한 은세공 기술자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백인 인류학자에게 한 말이다.
인류학에 대한 인상은 다양하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미개한’ 민족들을 재단하고 규정했던 편견의 학문, 또는 낯선 문화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탐색하고서 그럴싸한 논리로 설명하는 지식인의 취미나 여가생활 같은 학문. 어찌 되었든 인류학이란 타자를 관찰하고 나름의 논리로 정의하는 ‘일방적인’ 학문이란 느낌이었다.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 세계화의 부작용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시점에 인류학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타자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관찰하는 특성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류학은 학문이나 사회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도식을 부수는 힘을 갖추었고, 이 힘을 응용해 진화하고 있다. 제국주의 이론을 정당화하고자 태어났으나 오히려 타자를 이해하고 온갖 가짜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힘을 역설적으로 갖게 됐다. ‘잭 구디의 역사인류학 강의’(잭 구디 지음, 김지혜 옮김, 산책자 펴냄)도 이러한 시각으로 역사인류학을 선보인다.
잭 구디가 역사인류학자가 되기로 한 것은 아주 우연한 경험 때문이다. 원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구디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다. 포로수용소에서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당시 최고의 인류학자이던 고든 차일드의 ‘역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읽고 전공을 인류학으로 바꾸게 된다.
구디가 주로 다루는 음식, 사랑, 문자라는 세 가지 키워드는 분절된 것이 아니라 문명 속에서 하나로 얽혀 나타나는 현상이다. 음식 만들기와 먹기는 그저 생존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계급과 사회구성이라는 거시적 범주에서부터 조리법과 입맛에 이르는 미시적 범주까지 ‘먹기’의 위력은 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척도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어떻게 중국 음식점은 서구 사회에 깊이 파고들 수 있었을까. 서구로 이주한 아시아 노동자들의 식생활은 백인들의 입맛까지 바꾸어 놓았다. 중국인은 일찍부터 발달한 도시 문화를 갖고 있어 음식점 경영에 익숙했으며, 값싼 재료와 쉬운 조리법으로 음식 사업의 우위를 점했다. 또 고급 요리는 계급의 분화가 일어난 사회 특유의 현상이라고 구디는 설명한다.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이 구체화하지 않은 사회에서 지배층은 피지배층보다 단지 더 많이 먹었을 뿐이다. 그러나 계급 차이가 발달하면 상층 계급은 희귀한 재료와 정교한 조리법으로 자신들만의 ‘먹는 문화’를 만들고, 사치 금지법을 통해 이 ‘다르게’ 먹는 문화를 독점하려고 든다.
아프리카 요리가 없는 까닭도 계급이 정교하게 분화되지 않았고 지속적인 문자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요리는 고급화되고 기록되어 세계에 선보이지 못했으며 호텔 요리나 레스토랑처럼 자본화되지도 못했다.
저자는 ‘로맨틱한 사랑’을 통해 동양과 서양이란 이분법적 사고의 틀도 깬다. 로맨틱한 사랑이란 개인이 자아를 강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한 편의 드라마로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고도로 문명화된 개념이라는 게 구디의 설명이다. 글이 확산되고 여성들의 교육이 일반화되면서 여성들은 성취와 오락의 수단으로 로맨스와 소설로 향했다. 로맨틱한 사랑은 추상적인 근대화가 아니라 글을 아는 여성들에 의해 확산되었으며 저자는 그 예로 중국 시에 등장하는 뜨거운 사랑의 심상, 원시 부족들의 사랑 노래 등을 제시한다. 2만 3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2010-09-1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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