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심어놓은 수수께끼…게임하듯 달려드는 독자들

곳곳에 심어놓은 수수께끼…게임하듯 달려드는 독자들

정서린 기자
정서린 기자
입력 2017-02-24 17:44
수정 2017-02-2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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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열풍 계기로 본 ‘신드롬의 이유’

문단 아이돌론/사이토 미나코 지음/나일등 옮김/한겨레출판/300쪽/1만 5000원

무라카미 하루키(68)의 신작 소설 ‘기사단장 살인’이 출간된 24일 일본 서점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일부 서점들은 카운트다운 이벤트와 함께 이날 자정부터 책을 팔았고, 몰려든 하루키 팬들은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었다. 출간 전에는 소설 내용을 미리 상상해보는 ‘공상독서회’가 열리기도 했다. 호응이 뜨겁자 출판사 신초사는 당초 100만부 찍어낼 초판 부수를 130만부까지 늘렸다.

등단한 지 40여년에 칠순이 다 된 작가를 향한 현상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풍경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무엇이기에 ‘하루키 신드롬’은 수십년째 이토록 강렬하게 현재 진행형인 걸까. 일본 비평가 사이토 미나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1980년대 일본 사회에 대한 통찰과 함께 풀어냈다.

1980년대 일본은 거품경제로 극단적인 호황과 불황, 페미니즘의 대중적 유행, 지적 권위주의의 파괴를 한꺼번에 겪었다. 경제 성장에 주력했던 전후 목표가 사라지면서 출세 혹은 사회 변혁 등으로 뭉쳐지던 개인의 정체성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생활 수준이 올라가면서 개인들은 자신이 어떤 사회 집단에 속하는지, 무엇을 보람으로 살아야 하는지 흔들리게 됐다. 문학, 사상, 교양의 가치 체계도 함께 와해됐다. 그 틈을 메운 것이 바로 ‘1980년대 문단의 아이돌’들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하루키 현상’의 배경에는 하루키 작품 읽기를 게임하듯 숨은 의미를 찾으려 덤비는 오타쿠 독자와 비평자들이 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하루키 랜드가 오락실이고 난도 높은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자 하루키 문학 속 수수께끼 찾기에 탐닉하기 시작했다는 것. 소박하고 단순한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가 ‘편안한 변두리 다방’이었다면 ‘양을 둘러싼 모험’(1982)부터 하루키 문학은 다양한 게임 장치를 추가하며 ‘거대 기업’으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저곳에 먹이를 뿌려놓는다. (중략) 거기에 보기 좋게 걸려든 독자는 수수께끼 풀이에 모든 열정을 쏟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만큼 수수께끼 풀이, 해독 사전을 낳은 작품도 드물지 않을까.’(28~29쪽)

퍼즐과 텔레비전 게임 속에서 자란 세대의 감각을 포착해 작품에 많은 수수께끼를 심어놓았던 하루키 작품을 저자는 ‘독자의 참여를 부추기는 인터랙티브 텍스트’라고 압축한다. 게임 욕망을 자극하는 그의 문학은 수수께끼 푸는 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비평가들에겐 최상의 재료였다. 달리 말하면, 1980년대 일본 문학, 사상계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할 때 하루키는 비평은 어려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게 하고 그에 응용할 텍스트를 제공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하루키 비평 게임’이 오타쿠 문화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진단한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하루키 신드롬이 쇠락하기는커녕 더욱 활기를 띠는 이유라고 말이다.

저자는 1980~1990년대 일본 문단의 주요 저자 8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들의 허점을 사회 변화의 맥락과 함께 촘촘히 짚어냈다. 1988년 ‘키친’으로 데뷔한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전에 경시됐던 ‘소녀 문학’을 공식 무대에 올려 ‘문단 아저씨’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줬다는 지적, 사회 현상을 성급히 픽션으로 만들어내 ‘5분 후의 뉴스쇼’ 같은 무라카미 류의 작품은 설득력도 부재하고 허세를 금세 간파당하고 말았다는 비판 등 솔직하고 예리한 입담이 인상적이다. 책을 우리말로 옮긴 나일등 번역가는 이런 저자를 가리켜 “사이토는 작가보다 더 값어치 있는 글을 쓰는 평론가”라며 “그에게서 지적 만족을 얻은 사람은 더이상 시시한 것에서는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7-02-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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