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할 말 없다. 이대로 빨리 집행하라.”
영화를 본다면 이 같은 대사부터 나오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처형 장면에서 시작하는 그의 평전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같은 해 12월 처형된 윤 의사의 유해는 일본군 유족들이 오가는 입구의 쓰레기 버리는 곳에 암장돼 유해가 발굴되기까지 13년간 짓밟혔다.
사실 윤 의사에 대한 연구나 책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김구나 안중근 등 다른 유명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적은 수백권씩 나왔지만, 윤 의사에 대한 책은 어린이 위인전 등을 포함해도 20~30권에 불과하다.
이 같은 평가절하의 배경에는 ‘행동대원 프레임’이 있다. 김구의 지시에 따라 윤 의사의 거사가 있었다는 ‘백범일지’ 등의 기록을 근거로 그동안 윤 의사는 김구의 그늘 아래 있었다. 하지만 상하이 거사 당시 윤 의사는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다. 거사를 누구와 모의했는지에 대한 윤 의사의 1·2차 심문조서가 뒤바뀐 이유, 광복군 홍보 책임자 김광의 증언 등을 토대로 보면 윤 의사는 스스로 거사를 계획해 실행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윤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남긴 편지 ‘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아들에게 쓴 편지가 오히려 인간 윤봉길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4살 아들에게 ‘너는 아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비는) 이상의 열매를 따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을 뿐’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떠난다.
흔히 윤봉길을 얘기하면 떠오르는 ‘도시락 폭탄’에 대한 ‘팩트체크’도 흥미를 끈다. 실제로 윤 의사가 던진 것은 물통 폭탄이었고, 도시락에 숨긴 폭탄을 연이어 던지기 직전 체포되고 말았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청년 윤봉길’에 대한 대중의 부족한 이해는 저자가 평전을 쓴 이유가 됐다. 저자는 이밖에 농촌운동가, 시인, 야학 선생님이었던 윤 의사의 또 다른 모습도 함께 소개한다.
저자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비(非) 역사학도다. 그가 밝힌 윤 의사의 이면은 아직 우리 학계가 밝히지 못한 독립운동사가 여전히 많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2019-03-15 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