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향기로 여는 새해 새아침 풍경들
겨울 사진/안시아시린 겨울 하늘,
발자국이 느낌표로 찍혀 나온다
가늘게 휘어진 나무 가지 끝
잎새의 무게가 매달려 있다
오늘 지켜야 할 약속 때문에
외투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느 간이역 편도행 열차에 오른다
포장마차는 밤이라는 경계를 오가며
긴 줄기마다 알전구를 피워 올린다
나무 한 그루 좌표를 긋는 하늘 아래,
어둠은 저녁의 불빛을 한데 끌어모아
미명을 맞는다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풍경들,
모두 지나간 것처럼 시간은
사진이 된다
400년 된 느티나무와 달
일출 전 붉은 그을음
일출하면 보통 장엄한 동해의 일출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서쪽에서 해가 뜬다는 서해의 일출도 낯설지 않은 것들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좀 더 색다르게 나룻배가 고즈넉한 배경이 되어 주는 강가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어떨까.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이 만나는 지점이라 뜻하여 ‘두물머리’라는 명칭을 얻은 나루터의 아침이 어둠 속에서 속력을 내게 한다.
커피박물관과 매표소인 빨간버스
두물머리의 미명
여행은 답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 하나 던지러 가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이런 풍경들과 맞닥뜨리면서 어떤 답을 찾기도 하고 때론 고백도 하면서 아름다운 취조를 당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좋은 질문 하나 던질 수 있는 것이 어떤 해답을 찾는 것보다 더 값지고 벅찬 일일 것이다.
어느새 푸른 미명의 나루터는 어둠의 꺼풀을 벗으며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같은 사물과 같은 장소지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이 시간을 평생 어떻게 설명하며 헤아릴 수 있을지. 그저 신비스러운 자연의 일부 앞에서 다시 사색하며 겸손해질 뿐이다. 느티나무 가지 사이 동그란 달을 마주한 채 태양은 그렇게 떠오르고 있다.
따스한 커피 한 잔이 절실했던 새벽녘 추위를 데리고 발길은 다음 여정인 인근 10분 거리의 커피박물관으로 향했다. 북한강을 바로 마주하고 있는 짙은 커피색같은 붉은 건물과 그 앞 매표소로 쓰이고 있는 빨간 버스는 이국적이면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면 빨간색은 겨울을 가장 겨울답게 채색해 주는 색깔인 것 같다. 빨간 크리스마스 장식들, 산타의 빨간 모자, 리본 등등…. 박물관의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일출을 기다리느라 차가워졌던 몸이 조금씩 데워지는 것 같다. 평소 쉽게 접할 수 있는 커피라는 기호식품이어서 그런지 박물관의 테마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었는데, 직접 접한 커피의 역사는 꽤 진지하고 흥미로웠다.
사실 나는 커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커피광도 아니다. 또한 커피를 마신다고 해서 기분이 상쾌해진다거나 혹은 잠이 오지 않는 체질도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원두커피보다는 자판기커피의 구수한 향이 좀더 익숙한, 커피 마니아들이 보면 촌스러운 스타일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하지만 새해를 준비하는 시간 속에서 이 커피 한잔의 향기와 흥미로운 역사,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두물머리의 일출과 새해에 대한 사색을 한층 더 산뜻하고 윤기나게 해준다고 할까. 아마도 이곳 박물관을 통해 커피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처음으로 직접 원두를 갈아서 마셔본 그 느낌, 음악, 그리고 향기…. 2010년은 빛과 향기로 가득한 환하고 향긋한 시작이 될 것만 같다.
그렇게 한 해를 뒤로 하며 새해를 지나고 있다. 일출과 커피향기의 2010년은 경인년 범띠의 해이다. 나 역시 범띠여서 그런지 조금은 남다른 새해를 맞이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능선 너머 강가를 비추는 푸른 미명 앞에서 그저 매순간 좀더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을 적어본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길 수 있다면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저 1월의 태양과 새로운 출발 앞에서 좀더 떳떳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뒷모습이란 가족이나 연인 간의 사랑일 수도 있겠고 각자 새해에 꼭 이루고 싶은 다양한 소망의 종류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시작은 늘 아름다운 뒷모습과 끝이 맞닿아야 할 것이다. 누구도 건너뛸 수 없는 눈부신 하루치의 보폭이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기울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끝은 늘, 지금처럼 다시 시작인 것이다.
글·사진_ 안시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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