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고 생각하고 산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고 생각하고 산다

입력 2010-03-07 00:00
수정 2010-03-0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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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 그의 꿈] 백남준 국제예술상 첫 수상자 이승택 화백

2009년 11월 28일 오후 5시, 경기도 용인시의 백남준 아트센터. 백남준 아트센터가 제정한 국제예술상 첫 번째 수상자로 결정된 이승택 작가가 수상소감을 말하는 대신 그가 쓴 시를 낭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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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가루 그림(1967) 앞에서 인터뷰하는 이승택 작가.
꽃가루 그림(1967) 앞에서 인터뷰하는 이승택 작가.




하나둘 세기도 힘든 80인데 / 내 마음 30은 어느새 80이니 氣가 차다 / 그래도 팔팔한 청년 수명이 80이라니 / 아직 100은 어림없고 / 힘들게 너무 오래 살았다고 서러울까 /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어도 유별나게 / 독설과 야유 패러독스를 뿌리며 / 마음껏 사람답게 살려고 했지 / 헌데 재수 없이 권력 더러운 선후배 놈들에게 / 힘들게 무던히도 당해 골탕 먹었지 / 남 다른 내 재주 몽땅 사기당하고 / 왕따 헌신짝 신세 되고 보니 / 세상 밖에서 모든 것이 거꾸로 살라 하더라 / 해서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고 / 거꾸로 생각하고 거꾸로 살았지 / 80이 돼서야 겨우 生을 짐작했지만 / 세상을 逆行하면 저절로 예술이 보이고 생겨났지 / 허나 평생 고되게 찾던 예술도 별것 아니고 / 人生도 그렇구 그런 만화경 속에 놀아나 / 10년이면 내일이요 그때 나는 90인데 / 노망 90을 어떻게 虛風만 떨겠는가 / 어지러운 내일을 모르는 시들한 喜悅의 生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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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1970)
바람(1970)


한쪽에선 화가 이반이 사람들 들으라는듯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이건 이승택 선생님을 모독하는 겁니다. 아니, 이승택상을 백남준이 받아야지, 어떻게 백남준상을 이승택이 받습니까?”

시상식장에서 벌어진 자그마한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수상 작가 중 한 명인 안은미 씨가 아트센터 외부에서 펼친 퍼포먼스보다 더욱 백남준스러웠다(?). 이은미 씨는 시상식 이후에 <백남준 광시곡>이라는 제목 아래 피아노 75대와 25대의 크레인을 동원한 대규모 오프닝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은미 씨의 퍼포먼스를 보고 놀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이승택 화가의 수상소감을 대신한 시낭송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백남준이 살아 돌아왔다 하더라도 이승택 화가를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한 것을 흡족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승택 선생은 우리나라 실험예술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는 평면작업을 일찌감치 그만두고 1964년 <강에 떠내려가는 불붙는 화판> 퍼포먼스를 필두로 불, 연기, 바람 등 비물질의 세계를 형상화했다. 불상에 불을 지르고 형체 없는 바람을 소리로 잡아냈다. 그래서 이승택 작가를 아는 사람들은 백남준 국제예술상의 수상자로 그가 선정된 것에 불만을 표했는지도 모른다.

이승택 작가를 인터뷰하러 가기 하루 전에 서울에 엄청난 눈이 왔다. 눈밭을 헤치고 그를 인터뷰하러 가면서 ‘젊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도전정신, 반항의식, 새로운 것의 추구, 그러다가 문득 이승택 작가와 연배가 비슷한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요즘도 새로운 노래를 즐겨 듣고 부르신다. 얼마 전 노래방에 가서도 신유의 <잠자는 공주>, 현숙의 <물방울 넥타이> 등을 불렀던 생각이 났다. 만나자마자 그 이야기부터 했다. 노작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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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민속놀이
바람-민속놀이


“음치는 머리가 나쁘다. 종교, 좌파는 머리가 더 나쁘다. 60세 이상은 머리가 없다.”

평상시 생각하는 바라고 한다. 무슨 이야기인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변화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것을 비판한 말인 듯했다. 작가의 예술관이 알고 싶었다.

“작가는 시대의 정신에 걸맞은 작품을 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고가 뒤떨어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술가의 역량, 즉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변화하는 과정에서 예술가의 진정한 면목이 나타납니다.”

변화로 따지자면 이승택 만한 작가가 없다.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화단의 출신 대학이나, 누구누구의 제자에 얽매이지 않았고, 그의 말대로 거꾸로 살았다. 그가 작품의 소재로 삼은 것도 털 달린 캔버스, 밧줄을 두른 백자, 유리대롱, 링거병, 바람에 나부끼는 천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변화하지 않는 작가는 죽은 작가로 친다. 외국 거나 모방하면서 대중에 영합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친구도 별로 없고 작품이 팔리는 것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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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진 석화(1968)
그려진 석화(1968)




늦게나마 수상을 축하한다고 말하자 노작가는 뜻밖의 말을 했다.

“사실은 백남준과 나랑 나이가 같아요. 나는 나름대로 세계의 사조와 관계없이, ‘세계는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욕심이 많다고나 할까요. 역사에 남아야겠다는 신념이 강했습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고, 화단에 받아지지 않아도 그것에 상관 않고 내 세계를 쭉 추구해왔습니다. <바람> 등의 작품은 세계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는데 국내에선 ‘그게 빨래줄이냐’ 하고 멸시당했습니다. 그런데 백남준이라는 작가가 70년대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라이벌 의식도 생겼겠지요. 하지만 내 마음속에선 내가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상을 준다고 하니까 한편으론 떨떠름하다고 할까 그랬지요.”

노작가의 얘기를 듣다보니 반야심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다른 작가들이 ‘색’의 세계를 추구했다면 그는 그 ‘색’의 근원인 ‘공’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현대미술은 고도의 지적인 놀이입니다. 비물질이나 시공의 세계를 최초에 시도한 것이 1958년인가 그랬습니다. 물질적인 것은 흔하니까 바람, 연기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시도했지요. 바람 속에 펄럭이는 소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게 했어요. 대단한 것인데 무식한 평론가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무슨 작품이 되느냐 그랬지요.”

이승택 작가가 시도한 것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자기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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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그림(1979)
물 그림(1979)


“새로운 것을 추구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 그러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요. 남이 안 하는 걸 내가 한다는 기쁨은 보통사람이 이해를 못해요. 그건 괴로움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하는 거지요. 즐길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는 즐거워서 한다. 어떤 분야든 새로운 것을 창작한다는 것은 고통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그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고통의 산물이 아니고 즐거움의 산물이라고.

“예술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이 될 때 예술은 죽어요.”

노작가의 말을 들을수록 그의 정신에 매료되어 갔다. 노작가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맞다고 믿는 통념들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은 나이가 들면 사라진다는 것, 예술은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등의 통념 말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상화하면서 우리 인식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TIP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백남준의 정신과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상.

현대예술의 맥락에서 백남준의 예술혼을 발전시키고 있는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백남준아트센터가 제정한 상이다.

국내외 심사위원 10인의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이승택, 씨엘 플로이에, 안은미, 로버트 애드리안 엑스가 선정되었다.

4명의 수상 작가들은 모두 정해진 틀을 벗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개념을 표현하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제1회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작가 전시는

2010년 2월 28일까지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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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김창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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