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 멸치젓] 곰삭음의 풍경, 기다림의 미학

[기다림 | 멸치젓] 곰삭음의 풍경, 기다림의 미학

입력 2010-03-07 00:00
수정 2010-03-0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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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대변항의 멸치젓갈골목을 가다

기다림은 세월을 헤아리는 일이다. 생각을 준비하고(發心), 몸으로 행한(人事) 후, 그 결과를 묵묵히 예감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이란 것이 얼마나 끝없는 인내와 염원을 요구하는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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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다림은 온전히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음식에게도 기다림의 시간은 존재한다. 발효(醱酵). 미생물이나 균류 등을 이용해 인간에게 유용한 물질을 얻어내는 과정. 오랜 시간 발효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이 발효음식의 기다림도, 사람의 기다림만큼 숙연하고 그윽하다.

한 각 한 각의 시간들이 첩첩히 쌓이며, 수만 가지의 미생물과 다양한 성분들을 생성하고 키워내는 것이 발효음식의 기다림이다. 이 다양하고 유익한 성분을 인간이 섭취하면서 그들의 기다림은 장엄하게 그 긴 여정의 끝을 맞이하는 것이다.

발효음식은 오랜 숙성기간을 거치면서 원재료에는 없는 풍부한 영양분과 독특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대표적 장수식품이다. 그 역사만도 1만 년이 훌쩍 넘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의 발효음식이 역사적으로나 그 다양성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김치를 비롯해 전통 술, 그리고 간장, 된장 등 장류와 수많은 젓갈류, 각종 식해에다 전라도 홍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발효음식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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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더욱 빛이 나는 음식이 바로 젓갈이다. 김치와 더불어 우리 민족 전통음식 중 하나인 젓갈. 발효식품의 진수이자 우리 식단의 간판음식. 음식의 간을 맞추기도 하고 밑반찬으로 직접 상에 오르기도 하는 젓갈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기 힘든 자극이다. 도대체 배겨 낼 재간이 없는 강렬한 식욕이다. 깊고 풍성한 ‘곰삭음’의 진미가 눈, 코, 입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을 괴롭힌다. 예부터 ‘밥도둑’이라는 악명(?)을 떨칠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풍미를 내는 음식이 바로 젓갈이다.

그 종류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생선젓으로는 멸치젓, 조기젓, 갈치젓, 황석어젓, 정어리젓, 전어젓, 자리젓, 밴댕이젓, 병어젓… 등이 있고 내장, 알젓으로 창란젓, 갈치내장젓, 전어밤젓, 전복내장젓, 명란젓, 성게알젓, 청어알젓, 연어알젓, 아가미젓… 그 외 새우젓과 토하젓, 꼴뚜기젓, 낙지젓, 오징어젓, 어리굴젓, 조개젓, 가리비젓… 바다의 것들을 모두 망라해서 만들어내는 곰삭음의 예술이 바로 젓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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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은 김장용 젓갈을 주요 젓갈로 꼽는데 지역마다 사용되는 젓갈들이 다르다. 새우젓, 갈치젓, 황석어젓, 멸치젓 등이 그것으로, 그중 경상도 지역은 멸치젓을 첫 손꼽는다.

부산시 기장군 대변항. 전국 최대의 멸치 전문 어항. 싱싱한 멸치 비린내와 멸치젓 곰삭는 냄새로 아침이 서고 저녁이 지는 곳. 그래서 ‘대변’하면 ‘멸치젓’, ‘멸치젓’하면 ‘대변’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로 전국 최대 규모의 멸치젓갈 생산, 유통시장이다. 한마디로 멸치젓갈의 고향이자 메카이다.

예부터 대변항에서는 팔고 남은 멸치를 오래 보관하기 위하여 자체 염장법이 발달했는데, 그 시절의 젓갈 담는 비법이 오늘날에 이어져 맛이 깊은 멸치젓을 생산해 오고 있는 것이다.

남해안의 대표적인 젓갈인 멸치젓. 멸치젓은 숙성 정도와 담은 계절별로 크게 나뉘는데, 멸치 살을 먹는 육젓과 김장용과 양념소스로 사용되는 액젓으로 대별된다.

액젓은 봄 멸치로 담는데, 살이 부드러워 발효와 함께 액체 상태가 된다. 주로 2월 중순부터 5월까지 잡는 멸치를 사용하는데, 새우를 많이 먹고 알을 밴 상태의 3~4월 멸치가 맛있는 젓갈이 된다.

육젓은 육질이 단단한 가을 멸치(추젓)를 쓰는데, 제대로 다 자란 탓에 몸집이 크고 굵다. 그래서 대멸이라고 하며 주로 3개월 정도 숙성시켜 밥반찬으로 사용된다.

대변항 멸치젓갈골목을 어슬렁거려 본다. 온 마을이 곰삭은 젓갈 냄새로 구수하다. 한창 멸치를 버무리고 있는 대길수산 김귀남(50) 사장에게 맛있는 젓갈 담는 법을 물었다. “우선 제철의 싱싱한 멸치와 좋은 소금(국산 천일염)을 사용해야 되고예, 담그는 사람의 짭쪼름한 손맛이 들어가야 됩니더.” “손맛이라면 어떤 것을 말합니까?” “멸치와 소금양의 비율을 잘 맞추는 것부터, 이들을 골고루 섞이도록 잘 버무려주는 기술을 말하지예.”

멸치젓의 기본은 멸치와 소금의 절묘한 배합에 있다. 소금간이 싱거우면 꼬리하고 역한 냄새가 나고, 소금간이 짜면 멸치젓이 가지는 구수한 냄새와 깊은 맛이 없어진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되면 적당한 온도에서 일정 기간 보관을 잘 해야 된다. 되도록이면 많은 양을 담을 수 있는 큰 항아리에 완전 밀봉하여 발효시켜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밀봉 후에는 항아리를 움직이거나 충격을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모든 생물들이 조용하고 편안하게 잠을 자야 생명력이 오르듯이, 젓갈도 제대로 재워야 맛있는 음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만큼 발효는 민감하고 까다로운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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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멸치젓을 담아 온 염씨집을 찾았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깊고 구수한 멸치젓 냄새가 진동을 한다. 60리터의 세라믹 항아리에서 구수하게 한창 발효되고 있는 멸치젓.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미 멸치는 다 녹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 용수를 박고 체로 찌꺼기를 걸러내자 갈색의 맑은 액젓이 얼굴을 내민다. 한 입 찍어 맛을 본다. 오랫동안 곰삭은 맛이 깊은 우물만큼 투명하고 깊다.

“액젓은 발효 1년 6개월부터 맛이 깊어지는데, 3년이 맛의 정점입니다. 2년 된 것은 맛이 진하고 구수하여 김장용 양념과 쌈장소스로 쓰이고요, 3년 된 것은 냄새가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맛이 부드럽고 깔끔해서 천연조미료나 각종 나물, 해조류 무칠 때 사용이 됩니다.”

멸치젓 한 되를 구해 가게를 나선다.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기장미역으로 한 입 크게 쌈 싸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이고 사람마저 기꺼워진다.

다시 대변항. 새벽에 출항한 멸치배가 정오경에 갈매기 떼를 앞세우고 입항한다. 대변항은 소란스레 활기를 띤다. 멸치가 뛰는 날이면 대변항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진다. 귀항한 배에는 만선의 오색 깃발이 펄럭인다. 사람들 얼굴마다 웃음이 환하다.

곧이어 대변항에서만 볼 수 있다는 멸치 후리기가 선원의 ‘후리기 소리’에 맞춰 시작된다. 어느 틈엔가 모여든 한 무리의 구경꾼들과 멸치 후리다 떨어진 멸치를 줍는 동네 촌로들. 그리고 하늘을 하얗게 덮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갈매기 떼까지 모두들 여유롭다. 그물을 후릴 때마다 후드득후드득 햇빛 한 조각을 물고 세상 밖으로 튀어 오르는 멸치 떼. 멸치 속의 맑은 영혼이 반짝인다. 역동적이면서도 정겨움이 묻어나는 후리기 풍경이다.

멸치를 후리고 나면 멸치의 화려한 변신이 그 자리에서 바로 이루어진다. 경매장에서는 즉석 경매가 시작되고, 멸치골목에서는 싱싱한 멸치를 회 무침용 횟감으로 다듬어 낸다. 그 옆에는 즉석에서 멸치를 소금과 버무려 10여 초 만에 멸치젓갈을 담아준다. 가끔 좌판에는 후린 멸치를 바로 구워먹는 멸치통구이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이 거의 한식경 만에 다 이루어지니, 멸치의 급한 성격과 걸맞은 일생의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대변항에는 그렇게 멸치의 일생이 피고, 또 진다.

글_ 최원준 도서출판 말씀 대표·사진_문진우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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