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익은 것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다. 우리는 그 아픈 마음의 색깔을 그리움이라고 한다. 그 그리움은 추억이란 이름의 그물에 걸려 우리 곁에 오래오래 머문다.
이제 경춘선 그 열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2010년 12월 24일 밤 11시 50분 경춘선 마지막 디젤 기관차가 여섯 개의 객차를 매단 채 세 번의 긴 기적을 울리며 남춘천역에 들어왔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마지막 열차의 모든 불이 다 꺼지면서 어둠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숨 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비들기호, 통일호, 무궁화호 - 그 동안 속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했던 경춘선 열차의 기적소리 71년. 이제 그 누구도 시간 저쪽으로 영원히 사라진 경춘선 열차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오직 기억의 갈피에 아름답게 어려 있는 그때 그 이야기를 찾아 추억 여행에 오르는 일로 경춘선 열차와 다시 만날 뿐이다.
71년 동안 단선 궤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려온 경춘선 열차는 사람마다 그 얽힌 추억이 다를 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서울을 오갈 수 있는 고단한 삶의 한 갈피로서 경춘선이 잊히지 않을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춘선이 사랑과 낭만의 키워드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동백꽃(생강나무) 피는 계절이 오면 돌아오겠다는 그 말만 믿고 오매불망 춘천역만을 바라보고 산 소양강 처녀에게는 경춘선 열차의 그 기적소리가 기다림의 긴 한숨이었을 터.
산과 물과 길이 가장 잘 어울리는 길, 경춘선의 풍경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속삭였을 사랑의 밀어가 북한강 물 흐름소리에 어려 있다. 그리고 긴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전력 부족으로 전등이 꺼지던 열차 안에서 사랑하는 이의 손을 맞잡던 순간의 그 가슴 두근거림이 오늘을 살아가는 리듬으로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내가 경춘선 열차를 처음 본 것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춘천으로 유학을 왔을 때다. 철길 가까운 근화동에 하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그 철롯둑 위에 놀러 나갔다. 멀리 소실점을 향해 곧바로 뻗은 철길을 걸으면서 나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 어느 봄날 나는 그 철길 위에 앉아 꺽꺽 소리 내어 운다. 그 나이에 느낄 수 있는 열패감의 폭발이었다. 열아홉 살 나이의 그 감상은 철길 건너편 산비탈의 진달래를 본 순간 또다시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바로 그날 그 철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됐을 아이가 철길 밑 움막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 가난 콤플렉스가 컸던 내게 철롯둑 아래 움막 속에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새로운 세상의 발견이었다.
움막에 들어갔던 아이가 얼굴과 손에 진물이 질질 흐르는 나환자 아버지와 함께 나왔던 것이다. 나와 꽤 멀리 떨어진 철길 위에서 자기 아버지의 손에 무슨 약인가 발라주고 있는 그 아이를 본 순간 내 속에서 뭔가 굼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참담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그 아이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쓴 소설 63장 분량의 <산에 오른 아이>는 문둥병 아버지를 둔 한 아이가 진달래가 핀 산에 들어가 주머니칼을 빼든 채 잠이 들어 있는 장면을 결말로 완성된다. 그 작품이 제6회 학원문학상 고등부 소설부문에 3등 입상한다. 글 쓰는 즐거움, 작가로서의 길이 경춘선 철롯길 위에서 열린 것이다.
그 철롯길 위를 달리는 경춘선 열차를 난생 처음 탄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59년 연말 겨울이다. 경희대학교 입학원서를 사기 위한 상경, 표를 사기 위해 춘천역 광장에 줄을 섰을 때의 그 설렘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 등단작 <同行>도 경춘선 열차 속에서 발상되었다. 1961년 겨울 방학 때 춘천에 내려와 친구들과 밤 눈길을 헤매던 일을 상경하는 열차 안에서 떠올렸던 것이다. ‘그 밤 눈길을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자.’ 동행이란 낱말이 소설 제목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의 그 흥분이라니. 특히 함께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부득이 함께 걸어가야 하는 그런 얘기를 소설로 만들자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히 내다본 경춘선 그 건너편 산비탈의 눈밭 풍경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1985년 서울 탈출도 경춘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강원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뒤 나는 거의 10년 가까이 경춘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춘천을 오르내렸다. 서울 가는 막차와 춘천 가는 새벽 기차 속은 언제나 텅텅 비었다. 내게 그 헐렁한 기차의 규칙적인 덜커덩거림은 자장가와 다르지 않아 모자라는 잠을 채우기에 그만이었다.
기차가 긴 터널을 통과할 즈음에는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터널을 빠져 나오는 순간 펼쳐지는 경춘선 풍경은 장면 장면이 모두 새로웠다. 특히 북한강 강물 위의 물안개는 어느 때 보아도 장관이다. 아슴아슴 피어오르는 그 물안개를 바라보며 작품 구상을 했다.
중편소설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섞지 아니할 씨> <투석>, 그리고 장편소설 <유정의 사랑> 등이 경춘선 열차 속에서 발상되고 그 얼개가 짜진 것들이다.
그리고 2004년 경춘선의 간이역 ‘신남역’이 우리나라 철도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 이름이 들어간 ‘김유정역’으로 그 역명이 바뀌면서 30년대 작가 김유정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된다.
그리고 경춘선 열차가 내려다보이는 금병산에 작가의 작품 이름을 딴 김유정등산로가 만들어지고 다시 그 산자락에 실레이야기길 열여섯 마당이 만들어지면서 경춘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아무튼 그 동안 경춘선은 내 문학적 상상력의 보고였고 오늘을 사는 내 걸음걸이에 딱 알맞은 속도로 아무 때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출구였으며 밖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결코 헤어날 수 없는 내 인생의 링반데룽이었다.
2010년 12월, 시대의 속도에 밀려 경춘선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 또 다른 역사를 써나가게 될 것이다. 경기도 가평부터 춘천 김유정역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구철도의 관광 자원화 계획이다. 이제 머지않아 북한강 강변 구철도 위를 달릴 관광 레일바이크와 꼬마열차가 사라진 경춘선 열차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나 달래줄는지 기대가 크다.
글_ 전상국 소설가, 김유정문학촌장
이제 경춘선 그 열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2010년 12월 24일 밤 11시 50분 경춘선 마지막 디젤 기관차가 여섯 개의 객차를 매단 채 세 번의 긴 기적을 울리며 남춘천역에 들어왔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마지막 열차의 모든 불이 다 꺼지면서 어둠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숨 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비들기호, 통일호, 무궁화호 - 그 동안 속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했던 경춘선 열차의 기적소리 71년. 이제 그 누구도 시간 저쪽으로 영원히 사라진 경춘선 열차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됐다. 오직 기억의 갈피에 아름답게 어려 있는 그때 그 이야기를 찾아 추억 여행에 오르는 일로 경춘선 열차와 다시 만날 뿐이다.
71년 동안 단선 궤도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려온 경춘선 열차는 사람마다 그 얽힌 추억이 다를 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서울을 오갈 수 있는 고단한 삶의 한 갈피로서 경춘선이 잊히지 않을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춘선이 사랑과 낭만의 키워드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동백꽃(생강나무) 피는 계절이 오면 돌아오겠다는 그 말만 믿고 오매불망 춘천역만을 바라보고 산 소양강 처녀에게는 경춘선 열차의 그 기적소리가 기다림의 긴 한숨이었을 터.
산과 물과 길이 가장 잘 어울리는 길, 경춘선의 풍경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속삭였을 사랑의 밀어가 북한강 물 흐름소리에 어려 있다. 그리고 긴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전력 부족으로 전등이 꺼지던 열차 안에서 사랑하는 이의 손을 맞잡던 순간의 그 가슴 두근거림이 오늘을 살아가는 리듬으로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내가 경춘선 열차를 처음 본 것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춘천으로 유학을 왔을 때다. 철길 가까운 근화동에 하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그 철롯둑 위에 놀러 나갔다. 멀리 소실점을 향해 곧바로 뻗은 철길을 걸으면서 나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 어느 봄날 나는 그 철길 위에 앉아 꺽꺽 소리 내어 운다. 그 나이에 느낄 수 있는 열패감의 폭발이었다. 열아홉 살 나이의 그 감상은 철길 건너편 산비탈의 진달래를 본 순간 또다시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바로 그날 그 철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됐을 아이가 철길 밑 움막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누구보다 가난 콤플렉스가 컸던 내게 철롯둑 아래 움막 속에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새로운 세상의 발견이었다.
움막에 들어갔던 아이가 얼굴과 손에 진물이 질질 흐르는 나환자 아버지와 함께 나왔던 것이다. 나와 꽤 멀리 떨어진 철길 위에서 자기 아버지의 손에 무슨 약인가 발라주고 있는 그 아이를 본 순간 내 속에서 뭔가 굼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참담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그 아이 이야기를 글로 써보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쓴 소설 63장 분량의 <산에 오른 아이>는 문둥병 아버지를 둔 한 아이가 진달래가 핀 산에 들어가 주머니칼을 빼든 채 잠이 들어 있는 장면을 결말로 완성된다. 그 작품이 제6회 학원문학상 고등부 소설부문에 3등 입상한다. 글 쓰는 즐거움, 작가로서의 길이 경춘선 철롯길 위에서 열린 것이다.
그 철롯길 위를 달리는 경춘선 열차를 난생 처음 탄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959년 연말 겨울이다. 경희대학교 입학원서를 사기 위한 상경, 표를 사기 위해 춘천역 광장에 줄을 섰을 때의 그 설렘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 등단작 <同行>도 경춘선 열차 속에서 발상되었다. 1961년 겨울 방학 때 춘천에 내려와 친구들과 밤 눈길을 헤매던 일을 상경하는 열차 안에서 떠올렸던 것이다. ‘그 밤 눈길을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자.’ 동행이란 낱말이 소설 제목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의 그 흥분이라니. 특히 함께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부득이 함께 걸어가야 하는 그런 얘기를 소설로 만들자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히 내다본 경춘선 그 건너편 산비탈의 눈밭 풍경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1985년 서울 탈출도 경춘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강원대 교수로 자리를 옮긴 뒤 나는 거의 10년 가까이 경춘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춘천을 오르내렸다. 서울 가는 막차와 춘천 가는 새벽 기차 속은 언제나 텅텅 비었다. 내게 그 헐렁한 기차의 규칙적인 덜커덩거림은 자장가와 다르지 않아 모자라는 잠을 채우기에 그만이었다.
기차가 긴 터널을 통과할 즈음에는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터널을 빠져 나오는 순간 펼쳐지는 경춘선 풍경은 장면 장면이 모두 새로웠다. 특히 북한강 강물 위의 물안개는 어느 때 보아도 장관이다. 아슴아슴 피어오르는 그 물안개를 바라보며 작품 구상을 했다.
중편소설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섞지 아니할 씨> <투석>, 그리고 장편소설 <유정의 사랑> 등이 경춘선 열차 속에서 발상되고 그 얼개가 짜진 것들이다.
그리고 2004년 경춘선의 간이역 ‘신남역’이 우리나라 철도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 이름이 들어간 ‘김유정역’으로 그 역명이 바뀌면서 30년대 작가 김유정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된다.
아무튼 그 동안 경춘선은 내 문학적 상상력의 보고였고 오늘을 사는 내 걸음걸이에 딱 알맞은 속도로 아무 때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출구였으며 밖에서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결코 헤어날 수 없는 내 인생의 링반데룽이었다.
2010년 12월, 시대의 속도에 밀려 경춘선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그대로 남아 또 다른 역사를 써나가게 될 것이다. 경기도 가평부터 춘천 김유정역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구철도의 관광 자원화 계획이다. 이제 머지않아 북한강 강변 구철도 위를 달릴 관광 레일바이크와 꼬마열차가 사라진 경춘선 열차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나 달래줄는지 기대가 크다.
글_ 전상국 소설가, 김유정문학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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