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몇몇 평전 중 ‘불일평전’은 비교적 낮은 곳에 있는 평전으로 약 300m 위에서 장엄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지리산 10경 중 한 곳인 불일폭포로 올라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산장이 하나 붙박이처럼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산장이라지만 아랫동네와 가까운 탓에 이름만 산장일 뿐, 산장에서 머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마당에 계곡물 끌어다 가두어 두고 그 안에 음료수를 넣고 등산객이 직접 골라 마시고는 돈을 직접 돈 통에 두고 가는 무인판매대만이 가끔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스름돈도 물론 본인이 알아서 챙겨야 합니다.
특별하게 감자전이나 컵라면을 찾는 사람이 간혹 있으면 산장 주인인 변규하 선생께서 손수 해주시기는 했고, 또 그 주변 산에서 채취한 약초와 풀, 나무 등으로 담근(오랜 기간 숙성시킨) 불로주라는 약술도 있어서 아는 사람은 일부러 마시러 오기도 했습니다. 산장의 주인인 고 변규하 선생은 약 35년 전, 그곳에 터를 잡고 2007년 돌아가실 때까지 그곳을 지키며 가꾸며 자연의 일부인 양 사셨습니다.
아랫마을에 사는 저는 거의 매일 그곳을 거쳐 ‘불일암’이나 ‘불일폭포’를 다녀오는 것이 일상이라서 자주 만나는 편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변 선생은 항상 하회탈처럼 웃으시며 나무를 보살피거나, 채마밭을 돌보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등짐을 져 올리거나, 멀거니 하늘을 쳐다보거나, 산천을 비라보거나, 지나가는 등산객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대머리인데다가 수염까지 덥수룩해서 언뜻 보면 연세 많은 할아버지 같으나 산장에 필요한 물건을 지고 올릴 때 보면 청년 같은 체력과 몸매를 자랑하셨습니다.
좌우에 백학봉과 청학봉을 거느린 불일폭포는 깎아지른 절벽과 쏟아지는 물줄기, 기백이 넘치는 노송, 겹겹이 쌓인 산 능선 아래로 백운삼봉이 내려다보이는 장쾌한 풍경 등 호방한 남성미가 넘치는 폭포입니다. 봉매산장은 그곳에서 불과 약 300m 아래쪽에 있는 정이 넘치고 여성적이며 아기자기한 예쁜 정원 같은 곳입니다. 변규하 선생께서 의도하고 가꾸셨지만 한반도 모형의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놀고 있고, 살이 통통하게 찐 다슬기들이 모여 있습니다. 또한 연못 주변에 멋스러운 나무를 심어 그 풍경을 더 돋보이게 했고, 산장 주변 곳곳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감탄이 절로 납니다.
무슨 나무든 변규하 선생이 가꾸시면 그 나무는 한층 더 멋스러운 나무로 다시 탄생됩니다.
또한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은 선생의 보살핌을 듬뿍 받아서 우아하고 탐스럽습니다. 산장을 약간 아래 두고 돌탑 무더기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돌탑은 산장을 짓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에 쌓았다는 돌탑으로 소망탑이라 불립니다.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고 세월의 부피만큼 멋스러운 풍경입니다. 돌탑의 돌들은 산장을 짓기 위해 집터를 고르면서 나온 돌들로 쌓았다고 하니 다시 한 번 더 올려다 보아집니다.
변규하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쯤 어느 날 변 선생께서는 이제야 집이 완성되었다며 이집을 완성하기까지 30년 세월이 걸렸다며 지난날을 회상하며 만족해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등짐으로 져 나를 수밖에 없는 관계로 어지간한 것은 그곳에 있는 돌과 흙, 나무를 이용했고, 벽은 유리병을 이용해서 흙과 함께 설치했는데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유리병들은 별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오목렌즈와 볼록렌즈 역할도 해 자연 감상용 망원경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건축한 줄 알고 묻기라도 하면 그때그때 대답을 재미나게 바꾸기도 합니다. 나무들과 주변 산들로 인해 사방이 막힌 듯하지만 나무 사이 작게 뚫린 자리에(동쪽 끝) 지리산 주능선의 끝자락인 노고단이 살짝 보이기도 해서 운치를 더해줍니다. 그 모든 것이 당신 것이고 또 그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것이었습니다.
처음 터를 잡으시며 차나무도 함께 심고 가꾸셨는데 고원의 차는 내 차지였습니다. 선생께서는 가꾸는 취미만 있었지 차를 만드실 마음은 없어서 나에게 돌아온 행운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차나무라 차 맛이 일품입니다. 그 맛 때문에 그 시기면 많이 바빠도 차 따러 오르내리는 수고도 감수합니다.
선생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참 자유인이였는데 어느 날 청년 같은 분이 쓰러지고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주인을 잃은 산장은 이 사람 저 사람으로 관리인이 바뀌며 그 빛을 서서히 잃어갔고, 선생이 가꾸던 나무는 함부로 자라거나 함부로 잘렸습니다. 내 차지였던 차 밭도 용하게 주인을 알아서 잎이 전만 못해졌고, 급기야 냉해까지 겹쳐서 나무가 많이 상했습니다. 이제는 덩굴까지 무성해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차 밭인지 아닌지도 모를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관리인이 자주 바뀌며 산장은 기운을 잃어갔고, 드디어 산장을 철거한다고 하며 애써 올라온 짐들이 다시 등짐으로 내려가고 선생님이 애지중지했던 물건들은 버려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 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났을 뿐인데 그 빛났던 모든 것은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랑받던 나무는 그냥 나무로, 탐스럽게 피던 꽃들은 그냥 꽃으로, 하나 된 우리나라를 자랑하던 연못은 그냥 물이 모여진 곳으로 ,처음 지어진 집에 30년간 조금씩 널리거나 꾸며온 집은 그냥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냥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그래서 어려서부터 올라 다니면서 봐온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많이 서운했습니다.
산장이 철거된다는 소식에 서운하고 안타깝고 허무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매일 올라 다녔으면서 매일 만나는 일상이라고 사진 한 장 찍어둔 것이 없다는 것에 놀라서 헐리기 전에 모습을 찍어 보았지만 주인 잃은 산장은 더 이상 산장도 그 무엇도 아닌 그냥 폐가일 뿐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쓸쓸하고 조금 슬펐습니다. 이제 폐가가 된 산장은 영원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언가가 새롭게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다시 건물이 들어설지 아니면 그냥 땅으로 있으면서 풀과 나무에게 삶의 터를 내줄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자리 잡던 우리는 다시 그곳을 오가며 익숙해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일평전 봉매산장은 잊혀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글_ 남난희 《낮은 산이 낮다》 저자
아랫마을에 사는 저는 거의 매일 그곳을 거쳐 ‘불일암’이나 ‘불일폭포’를 다녀오는 것이 일상이라서 자주 만나는 편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변 선생은 항상 하회탈처럼 웃으시며 나무를 보살피거나, 채마밭을 돌보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등짐을 져 올리거나, 멀거니 하늘을 쳐다보거나, 산천을 비라보거나, 지나가는 등산객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대머리인데다가 수염까지 덥수룩해서 언뜻 보면 연세 많은 할아버지 같으나 산장에 필요한 물건을 지고 올릴 때 보면 청년 같은 체력과 몸매를 자랑하셨습니다.
좌우에 백학봉과 청학봉을 거느린 불일폭포는 깎아지른 절벽과 쏟아지는 물줄기, 기백이 넘치는 노송, 겹겹이 쌓인 산 능선 아래로 백운삼봉이 내려다보이는 장쾌한 풍경 등 호방한 남성미가 넘치는 폭포입니다. 봉매산장은 그곳에서 불과 약 300m 아래쪽에 있는 정이 넘치고 여성적이며 아기자기한 예쁜 정원 같은 곳입니다. 변규하 선생께서 의도하고 가꾸셨지만 한반도 모형의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놀고 있고, 살이 통통하게 찐 다슬기들이 모여 있습니다. 또한 연못 주변에 멋스러운 나무를 심어 그 풍경을 더 돋보이게 했고, 산장 주변 곳곳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감탄이 절로 납니다.
무슨 나무든 변규하 선생이 가꾸시면 그 나무는 한층 더 멋스러운 나무로 다시 탄생됩니다.
또한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은 선생의 보살핌을 듬뿍 받아서 우아하고 탐스럽습니다. 산장을 약간 아래 두고 돌탑 무더기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돌탑은 산장을 짓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에 쌓았다는 돌탑으로 소망탑이라 불립니다.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고 세월의 부피만큼 멋스러운 풍경입니다. 돌탑의 돌들은 산장을 짓기 위해 집터를 고르면서 나온 돌들로 쌓았다고 하니 다시 한 번 더 올려다 보아집니다.
변규하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쯤 어느 날 변 선생께서는 이제야 집이 완성되었다며 이집을 완성하기까지 30년 세월이 걸렸다며 지난날을 회상하며 만족해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등짐으로 져 나를 수밖에 없는 관계로 어지간한 것은 그곳에 있는 돌과 흙, 나무를 이용했고, 벽은 유리병을 이용해서 흙과 함께 설치했는데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유리병들은 별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오목렌즈와 볼록렌즈 역할도 해 자연 감상용 망원경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건축한 줄 알고 묻기라도 하면 그때그때 대답을 재미나게 바꾸기도 합니다. 나무들과 주변 산들로 인해 사방이 막힌 듯하지만 나무 사이 작게 뚫린 자리에(동쪽 끝) 지리산 주능선의 끝자락인 노고단이 살짝 보이기도 해서 운치를 더해줍니다. 그 모든 것이 당신 것이고 또 그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 것이었습니다.
처음 터를 잡으시며 차나무도 함께 심고 가꾸셨는데 고원의 차는 내 차지였습니다. 선생께서는 가꾸는 취미만 있었지 차를 만드실 마음은 없어서 나에게 돌아온 행운입니다. 그 높은 곳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차나무라 차 맛이 일품입니다. 그 맛 때문에 그 시기면 많이 바빠도 차 따러 오르내리는 수고도 감수합니다.
선생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참 자유인이였는데 어느 날 청년 같은 분이 쓰러지고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주인을 잃은 산장은 이 사람 저 사람으로 관리인이 바뀌며 그 빛을 서서히 잃어갔고, 선생이 가꾸던 나무는 함부로 자라거나 함부로 잘렸습니다. 내 차지였던 차 밭도 용하게 주인을 알아서 잎이 전만 못해졌고, 급기야 냉해까지 겹쳐서 나무가 많이 상했습니다. 이제는 덩굴까지 무성해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차 밭인지 아닌지도 모를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관리인이 자주 바뀌며 산장은 기운을 잃어갔고, 드디어 산장을 철거한다고 하며 애써 올라온 짐들이 다시 등짐으로 내려가고 선생님이 애지중지했던 물건들은 버려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 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났을 뿐인데 그 빛났던 모든 것은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사랑받던 나무는 그냥 나무로, 탐스럽게 피던 꽃들은 그냥 꽃으로, 하나 된 우리나라를 자랑하던 연못은 그냥 물이 모여진 곳으로 ,처음 지어진 집에 30년간 조금씩 널리거나 꾸며온 집은 그냥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냥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그래서 어려서부터 올라 다니면서 봐온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많이 서운했습니다.
산장이 철거된다는 소식에 서운하고 안타깝고 허무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매일 올라 다녔으면서 매일 만나는 일상이라고 사진 한 장 찍어둔 것이 없다는 것에 놀라서 헐리기 전에 모습을 찍어 보았지만 주인 잃은 산장은 더 이상 산장도 그 무엇도 아닌 그냥 폐가일 뿐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쓸쓸하고 조금 슬펐습니다. 이제 폐가가 된 산장은 영원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무언가가 새롭게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다시 건물이 들어설지 아니면 그냥 땅으로 있으면서 풀과 나무에게 삶의 터를 내줄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자리 잡던 우리는 다시 그곳을 오가며 익숙해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일평전 봉매산장은 잊혀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글_ 남난희 《낮은 산이 낮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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