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있어 나는 강해졌습니다”

“당신이 있어 나는 강해졌습니다”

입력 2010-05-16 00:00
업데이트 2010-05-1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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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복싱 세계통합 챔피언 김주희 선수와 스승 정문호 관장

보통 선수는 쉬려 하고 코치는 더 연습하라고 다그치는 것이 보통인데, 어째 이 두 사람은 반대다. 김주희 선수(25세)는 연습을 더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정문호 관장(거인체육관, 52세)은 그만 하고 좀 쉬라고 소리를 지른다. 몰래 옥상에서 연습하다 걸려 혼나는 일은 다반사. “좀 들어가서 쉬어!” “집에 있으면 뭐해요. 마음이 불편해서 쉬지도 못한단 말이에요.” 대체 이 스승과 제자, 정체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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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김 선수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언니 운동복을 가지러 온 여자아이가 너무 예뻐 정 관장이 말을 걸었더니, 얼굴이 빨개지고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나가버렸단다. 그로부터 1년여 뒤 언니의 권유로 주희 씨는 체육관에 등록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은 시작되었다. 정 관장이 꼽는 김 선수의 장점은 ‘타고난 재질’보다는 ‘성실함’이다. 지난 12년간 연습에 빠진 날은 이틀에 불과하다. 수학여행을 보내놔도 하루 만에 돌아왔단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부모님의 이혼, 뇌경색으로 병석에 누운 아버지… 네 살 터울의 언니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근근이 생활하고 있는 그녀를 정 관장은 아버지처럼 돌봐주었다. “우리 딸 책 살 때 두 권 사서 한 권씩 나누어주고, 옷 사러 가면 주희 것까지 하나 더 사고 그랬죠.” 회비가 없어 체육관에 못 나올 때는 “돈 걱정 말고 나오라”고 했다. 한국챔피언이 된 이후엔 학교 공부에 소홀할까 염려가 되어, 영어단어 시험을 치르게 하고 만점을 받으면 용돈 2천 원씩을 주었단다. “우리 딸보다 더 잘해준 것 같아요.”

제1호 여성 프로복서, 최연소 한국챔피언, 최연소 세계챔피언… 앞만 보고 달리던 그녀에게 2006년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다가왔다. 발가락 골수염이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에서 시작된 염증으로 허벅지까지 까맣게 부어올랐다. 결국 엄지발가락 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고, 고름을 빼내기 위해 뼈에 구멍까지 뚫었다. 방어전 의무기한을 놓쳐 어렵게 딴 세계챔피언 벨트까지 반납해야 했다. “다시 링에 설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발을 딛지도 못했으니까요.”

‘지든 이기든 마지막으로 한 번 링에 서보자’고 마음먹고 재활훈련에 돌입했다. 정 관장은 뼈가 붙는 데 좋다는 음식을 해먹이고, 3층 체육관까지 주희 씨를 업고 다녔다. 그 3년 동안은 빨래도 정 관장의 몫이었다. “속옷 빨래 빼고는 다해준 것 같아요. 한 시간이라도 더 자게 해주려고.” 성치 않은 발이기에 김 선수는 더욱 이를 악물었다. 자신과 비슷한 체급의 잘한다는 남자선수는 모두 찾아다니며 경기를 했다. 오히려 부상 전보다 좋아진 실력으로 그녀는 재기에 성공했다. 작년 9월, WIBA(여자국제복싱협회), WIBF(여자국제복싱연맹), GBU(세계복싱연합) 라이트플라이급 3대 기구 통합 세계챔피언 타이틀 매치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챔피언 벨트를 다섯 개나 거머쥔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뜻밖의 소리가 나왔다. “제 별명이 울보예요. 만날 울고 다녀서 혼나요.” 세계챔피언에 도전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경기에 대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진 어느 날, 정 관장은 그녀에게 제일 무거운 아령을 들고 오라고 했다. “무겁지?” “네.” 아령의 한쪽을 받친 뒤 다시 물었다. “지금도 무거워?” “아니오.” “시합은 너하고 나하고 둘이 하는 거다. 고통도 반반이니까, 어떤 상대도 겁낼 게 없겠지?”

“연습을 많이 할수록 더 겁이 나는” 특이체질의 울보 ‘김주희’가 두려움을 딛고 당당히 링 위에 설 수 있는 건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다. “제 실력을 의심해본 적은 수도 없이 많아요. 하지만 관장님 실력을 의심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보통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불거지는 선수와 지도자 사이의 갈등도 이들에게는 먼 얘기다. “김주희는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질 못해요. 대통령이 와서 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요.”(웃음)

오는 5월, 김 선수는 체급을 낮추어 미니플라이급 세계타이틀에 도전할 예정이다. 또한 두 사람은 지난 3월 중부대학교 교육학과 대학원에 나란히 입학해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이미 지도자의 길을 밟고 있는 정 관장에게 대학원에 입학한 이유를 물었다. “얘, 학교 데리고 다녀야 되니까요.”(웃음) 김 선수는 8월 경기에 있을 지도자 자격시험도 준비 중이다.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솔직히 관장님처럼 할 자신 없어요. 저처럼 고집 센 선수 만나면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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