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사흘 전 CG 지시에 밤샘 근무… “드라마 뒤엔 저임금 착취” [K드라마, 카메라 뒤 사람들]

방송 사흘 전 CG 지시에 밤샘 근무… “드라마 뒤엔 저임금 착취” [K드라마, 카메라 뒤 사람들]

최훈진, 김주연, 민나리 기자
입력 2022-02-23 20:28
업데이트 2022-02-24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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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들 끝없는 갈아넣기식 노동

미술팀 먼저 나와 현장 철수 후 퇴근
의상 촬영 없어도 못 쉬고 소품 준비
“후반작업 계약대금 중 5분의1만 받아”

정부 근로감독, 현장기술 스태프 중심
회사는 프리계약 고수… 항의 어려워
“이한빛 PD 이후 근로 사각지대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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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한 뒤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을 고발했던 이한빛 PD의 5주기 추모제가 지난해 열린 가운데 추모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제공
tvN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한 뒤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을 고발했던 이한빛 PD의 5주기 추모제가 지난해 열린 가운데 추모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제공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지는 데엔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 부조리한 방송 노동 환경을 고발하며 스러져 간 사람들. 쉴 틈 없는 노동에 목숨을 잃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피해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렇게 세상이 조금씩 변했다. 고용노동부는 4년 전 방송 드라마 스태프의 근로자성을 인정했고, 법원은 감독급 스태프 또한 근로자라는 판단을 내놨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됐다. 부당한 연장근로에 반발하는 스태프들이 생겼다. 방송사로부터 외주를 받아 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사도 스태프를 여러 팀으로 나눠 근로 시간을 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메라 너머를 들여다보면 같은 드라마 안에서도 근로 조건에 격차가 있음이 드러난다. ‘사람답게 일할 권리’를 점차 찾아가는 현장 기술 스태프와 달리 소도구나 의상 스태프, 후반 작업(CG, 편집 등) 스태프는 문제가 있어도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대개 별도 스튜디오나 프로덕션 등의 회사에 소속돼 있어 현장의 기준이 적용되지 못해서다.

●현장 안팎 과중 노동 시달리는 미술 스태프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지 반년. 현장에선 ‘눈 붙일 시간은 생겼다’는 반응이 심심찮게 나온다. 자정까지 촬영이 이어져도 3~4일은 쉴 수 있어 체력을 비축할 수 있단 얘기도 있다. 다만 이런 변화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세트나 소품 등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미술팀에게 주 52시간제는 딴 세상 얘기다.

20년 이상 미술 스태프로 일해 온 이기상(이하 가명)씨는 “배우들이 화면 속에서 먹는 라면 한 그릇, 커피 한 잔까지 전부 미술 담당 스태프의 일”이라면서 “남들보다 일찍 나오지만 철수 작업 탓에 퇴근도 늦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군소리를 하긴 어렵다. 계약은 소속 회사 대표와 맺지만 실제로는 현장 감독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기 때문에 근무 시간 준수를 요구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의상 스태프 노도연씨는 “촬영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 찍겠다’며 장비를 챙겨 현장을 나가 버리는 팀도 더러 있지만 의상팀은 그런 건 꿈도 못 꾼다”고 하소연했다. 촬영이 없는 날도 다음 촬영에 필요한 소품이나 의상 제작을 준비하느라 쉴 수 없는 처지다.

서울신문이 드라마 스태프의 노동실태를 조사한 결과 의상을 포함한 미술 스태프 중 이동 시간과 식사 시간을 제외한 근로 시간이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76.2%였다. ‘주 6~7일 근무한다’는 응답도 57.1%로 절반을 훌쩍 넘었다. 현장 기술 스태프의 상당수가 현재 주 4일이나 3일 근무한다고 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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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 사각지대 만드는 ‘턴키 계약’

미술이나 의상 스태프가 유독 격무에 시달리는 건 ‘계약 관계’ 때문이다. 고용부와 법원이 드라마 스태프의 근로자성을 잇따라 인정하면서 스태프와 1대1로 개별 계약을 하는 현장이 늘었다. 그러나 회사나 스튜디오에 소속돼 있는 미술·의상 스태프의 사정은 다르다.

노씨는 “회사는 ‘필요하면 정규직 계약을 맺겠다’면서도 프리랜서 계약을 고수하고 있어 4대 보험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회사 대표의 지시와 현장에서 감독의 지시를 동시에 받고 있으니, 어디에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실제 조사에서 미술 스태프의 52.4%는 ‘턴키 계약’(제작사가 감독·팀장급 스태프와 팀 단위로 계약을 맺는 방식)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녹음팀이나 조명팀, 촬영팀의 경우 제작사와 1대1 계약을 맺은 비율이 절반 이상이었다.

이들의 업무 강도는 나날이 높아지는 추세다.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등이 제작비를 높이며 ‘고퀄’ 작품을 요구하고, 대중들도 ‘영화 같은 드라마’를 기대하게 돼서다. 이씨는 “영화 쪽 인력이 들어오면서 과거엔 색칠만 하면 됐던 것도 지금은 진짜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노씨는 “협찬 제품을 입히기만 하면 되던 때와는 달리 의상을 모두 제작하는 일이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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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VFX·CG 장면 너머엔 저임금 착취

‘영화 같은 드라마’를 만드는 데 빠질 수 없는 요소는 또 있다. 바로 후반작업이다. 시각특수효과(VFX)와 컴퓨터그래픽(CG), 색보정(DI)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황인수씨는 지난해 방영된 한 사전제작 드라마의 VFX 작업을 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한숨만 나온다. 대표는 주말에도 황씨에게 수시로 업무 지시를 내렸다. 방송 사흘 전 작업물을 넘겨주니 밤샘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후반작업을 담당하는 조연출인 최태석씨는 “제작사는 후반작업자들의 근로 시간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 “기간 내 완성품만 내면 된다는 식”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3년 전 SBS에서는 CG 업무가 채 완료되지 않은 드라마가 송출되는 초유의 방송 사고가 나기도 했다.

후반작업자들의 또 다른 고충은 ‘저임금’이다. 황씨는 우연히 회사가 제작사와 맺은 계약서를 본 적이 있다. 자신이 한 일의 대금은 1500만원이었지만 실제 받은 돈은 300만원에 불과했다. 드라마 CG 회사에 재직 중인 이유한씨는 “포괄임금제라 야근을 하든 주말에 근무하든 받는 돈은 똑같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조사에서 후반작업자 가운데 ‘저임금’을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의 문제점으로 꼽은 이들은 10명 중 7명(71.4%)이었다.

고용부는 2019년 현장 기술 스태프를 중심으로 근로감독을 했지만 이때도 미술이나 의상, 후반작업자에 대한 별도의 감독은 이뤄지지 않았다. 2016년 tvN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씨는 “현장의 노동 조건이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는 스태프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기획팀
최훈진 기자
김주연 기자
민나리 기자
2022-02-2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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