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오, 남편 안전 보장 조건 애국부인회 밀고이, 승려 신분으로 신궁참배·일제에 헌금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청년외교단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인물도 있다.
오현주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언니 오현관, 정신여학교 동문 이정숙·장선희와 함께 혈성부인회를 조직한 인물이다. 그런데 대구지법 판결문을 보면 그는 “남편이 5월 중국에서 돌아와 조선 독립은 도저히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으니 이런 운동은 그만두라고 엄금받아 관계를 끊을 것을 맹세했다”며 “김마리아가 주가 돼 부인회를 위해 노력해 준다고 하면 탈퇴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는 “탈퇴를 희망하고 10월 19일 재결성 모임에 출석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김마리아 권유에 의해 출석했다. 그날 새롭게 결성한 뒤 13도 지부장을 명했고 회원은 약 2000명이 됐다. 나는 그 후는 애국부인회에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는 자수 조서가 등장한다.
오현주는 자기 부부와 언니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를 밀고했고, 결국 1919년 11월 28일 애국부인회와 청년외교단 수뇌부가 체포됐다. 오현주 부부도 검거됐지만 하루 만에 풀려났다. 오현주는 해방 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으나 불기소됐고, 남편은 기소 후 보석 석방됐다가 이후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월정사 승려로 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가해 청년외교단 총무와 외교특파원을 역임한 이종욱은 궐석재판을 받고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대구지법 판결문에는 “이병철이 이종욱을 만나 임시정부 정황을 들었는데, 이종욱이 상하이를 가는데 임시정부에 어느 정도 송금해 달라고 해 3명 몫을 합해서 550원을 이종욱에게 건넸다”고 돼 있다.
이런 공적이 인정돼 이종욱은 1977년 건국훈장(3등급)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1930년대 친일 행적이 뒤늦게 확인돼 2011년 서훈이 취소됐다. 후손들은 ‘친일 행적은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이라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보훈처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행정소송에서도 패소했다.
이종욱은 청년외교단 검거 사태 이후 불교계로 돌아갔다. 조선불교 총본산 주지 대표였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일본군을 위해 기원제를 지내라고 조선 내 각 사찰에 하달했다.
또 친일강연회를 열고 일본 외무대신의 성을 따서 창씨개명했다. 조선 승려들에게 5만 3000원을 모금해 헌금도 했다. 1941년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사찰의 범종 등을 헌납했다. 해방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조계종 중앙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2019-03-14 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