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둥이 아빠’ 도준석 기자의 고군분투 육아휴직기
다둥이 삼남매가 처음으로 막내동생을 보던 날. 아이들이 기뻐하는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들 둘에 딸 하나 다둥이 아빠로 정신없이 지내고 있던 2015년 5월, 아내가 넷째를 가졌다. 넷째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설렘과 부담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출산일을 석 달쯤 앞두고 결단의 순간이 내게 찾아왔다. 조산 가능성이 있으니 아내는 앉는 것조차 삼가고 누워만 있어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에 그해 12월 나는 어쩔 수 없이 육아휴직이라는 카드를 뽑아야 했다. 청소나 빨래야 어찌어찌 남의 손을 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날마다 챙겨 줘야 하는 초등학생, 유치원생 아이들의 수업 준비와 숙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내 재울 때 흔들어 주고 우유 먹이고 평소에도 안고 있으니 온몸의 근육이 망가졌다. 양·한방 병원을 번갈아 방문하며 치료를 했고 결국 팔꿈치 통증인 엘보도 왔다.
넷째를 출산한 아내가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더 바빠졌다. 출산 후 100일까지는 무거운 걸 들면 안 되는 산모를 대신해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잠도 재워야 했다. 결국 등과 허리 상태가 나빠져 양·한방 병원을 번갈아 다녔고, 팔꿈치 통증으로 장기간 치료도 받았다.
밥을 챙겨 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평균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라면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먹여야만 했다. 청소 역시 자주 하지 못해 식탁이 깨끗할 리 없다.
딸내미 머리 묶어 주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다. 동그란 빗으로 머리를 고정시키고 고무줄을 묶는 건 절대 불가였다. 얇은 빗으로만 가능했다.
한 명이라도 감기에 걸리면 돌아가면서 아프다. 특히 겨울철에는 약이 항상 쌓여 있다. 이젠 후배 엄마·아빠에게 열 관리하는 법을 가르쳐 줄 정도는 된다.
한밤중에 열이 나 응급실 가는 건 기본이다. 어느 순간 응급실이 편안한 느낌이 들었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일상처럼 돼 버렸다.
나들이는 언감생심, 바깥바람 한번 못 쐬니 우울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쩌다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깔끔하게 멋을 부리고 싶어졌다. 온갖 멋을 내고 외출하는 전업주부들의 심정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6개월의 육아휴직은 아이들과 여행 한번 못 가고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아들 삼형제로 자란 나는 여성들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지 몰랐다. 끝도 없는 집안일은 당연히 여성의 몫이 아니었다. 육아휴직을 끝내는 날, 나는 그 당연한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육아휴직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너무도 좋았다. 커피가 이렇게 여유 있을 때 마시는 거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커피를 마신 이후에도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태풍 전야였다.
글 사진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2019-12-13 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