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서 ‘새정치 아이콘’으로…안철수는 누구

의사에서 ‘새정치 아이콘’으로…안철수는 누구

입력 2012-09-19 00:00
수정 2012-09-1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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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IT기업인ㆍ교수에서 야권 유력 잠룡 대열국정운영 능력 입증 과제..검증 공세 거셀 듯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19일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섰다.

지난해 9월 ‘안철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야권의 최대 잠룡으로 자리매김한 지 1년 만이다. 기존 정당정치에 대한 불만과 실망감이 안 원장을 현실정치 영역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러나 안 원장은 “정치 참여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정도의 말만 했을 뿐 그동안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아왔다.

그간의 이런 애매모호한 행보에 대해 정교하게 계산된 신비주의라는 비판적 관점도 있지만, 생소한 길에 들어서기 위한 숙성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이날 출마 선언으로 새로운 인생의 출발대에 선 안 원장은 우리나라 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새로운 정치 실험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의사에서 성공한 벤처 최고경영자(CEO), 국내에서 생소한 융합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여정을 거쳐온 그가 앞으로 정치인의 길을 어떻게 걸어나갈지 주목된다.

대선까지 남은 3개월은 그의 삶에 중대한 갈림길이다. 새로운 정치 실험을 펼칠 기회를 가지면서 ‘안철수 신드롬’을 현실화할지, 그동안 혜성처럼 나타났다 스러져간 숱한 인사들처럼 미완의 실험에 그칠 것인지 이 기간에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아이, 의대생으로 = 안 원장의 부친은 서울대를 나온 의사로, 안 원장이 2세 때 부산의 한 가난한 동네에서 개업했다.

유년시절 안 원장은 병아리를 기르기 좋아하는 평범하면서도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남들보다 한 해 먼저 입학하는 바람에 몸집이 작고 적응도 늦어 공부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안 원장은 저서와 방송 출연을 통해 “성적표에 ‘수’가 보였는데 ‘철수’의 ‘수’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그는 책벌레였다고 한다. 기계 조립과 분해에도 능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한국의 에디슨’을 꿈꾸던 안 원장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전교 이과 1등을 하며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장남이 가업을 잇는다고 하면 부모님이 기뻐할 것 같았다”는 것이 의대 진학의 이유였다.

수줍음을 타던 의대생은 구로동과 두메산골 무의촌에서 무료 진료를 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직접 대하면서 사회 현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느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과 달리 안 원장은 학창 시절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빈소에 들러 “우리 모두가 이렇게 보내드리기에는 너무 많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부채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백신 전도사가 된 의사, 성공한 벤처기업인으로 = 그는 의대 재학 중에는 의사의 길이 아닌 연구의를 선택했다. “환자를 진료하는 쪽보다 병의 원인이나 치료 방법을 발견하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단다.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의학실험을 더 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자신의 컴퓨터가 당시 국내에서 생소하던 바이러스에 감염되자, 직접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치료하면서 백신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7년간 새벽 3시에 일어나 백신을 개발하다가 출근해 의학실험을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보면서 “내가 받은 일부라도 사회에 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의대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생물학 실험에 집중해야 하는 바람에 봉사활동 시간을 내기 어려워지자 백신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는 일에 더욱 매달렸다고 한다.

군 제대 후에는 단국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안철수연구소를 창업해 기업인의 길로 들어섰다.

경영에 한계를 느끼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으로 유학길에 올라 학업과 경영을 병행하기도 했다.

안철수연구소가 벤처기업에 머무르던 시절 미국 보안업체인 맥아피로부터 1천만달러의 인수제의를 받았지만,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의 보호를 위해 안 원장이 이를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2004년 안철수연구소가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로서 가장 높은 매출 및 수익을 올린 상황에서 안 원장은 기업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뒤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솔직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안 원장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를 받고 카이스트 교수를 지내다 2011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9년 MBC TV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성공 스토리에 유머 감각이 더해지면서 그는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가진 인물로 떠올랐다.

안 원장은 2008년 애플 아이폰 도입에 따른 IT 혁명과 스마트폰 사회로의 진입 속에 새로운 트렌드의 아이콘 중 하나로 각광받아 온 상황이었다.

이후 안 원장은 지난해 9월까지 청춘콘서트를 진행해 대중과의 직접적인 접점을 넓히며 젊은이의 ‘멘토’ 이미지를 가지게 됐다.

◇교수에서 ‘정치인 안철수’로의 변신 = 안 원장은 카이스트 교수 재직 당시인 2010년 서울대 초청강연에서 “산업구조를 바꾸고 개선하고, 이에 필요한 정책적인 부분에 대해 직접적인 조언을 하는 게 지금 제가 우선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기업인에서 사회 변화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학계에 들어온 뒤 정부의 각종 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보폭을 넓혀왔다. IT 격변기에도 글로벌 흐름을 좇아가지 못하는 국내 IT 생태계 구조 및 정부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치적으로 부상한 것은 지난해 9월 서울시장직에 도전 의사를 내비치면서부터다. 다만 정치가가 아닌 행정가로서의 도전 성격이 강했다.

당시 안 원장은 지지율은 상당했지만 역시 출마 의사를 밝힌 당시 박원순 변호사에게 후보 자리를 전격 양보했다. 이런 과정에서 안 원장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박근혜 대세론’에 타격을 주며 야권의 잠재적인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특히 자신이 보유 중인 안철수연구소의 지분 37.2% 가운데 절반을 기부하기로 해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그러나 정치 참여 여부와 관련한 메시지를 선뜻 내놓지 않았다. 지난 1월 미국 방문 길에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치 참여 여부와 관련해 “열정을 갖고 계속 어려운 일을 이겨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한 뒤 정치 참여 및 대선 출마에 대해 언급을 자제해왔다.

그러던 그는 지난 7월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을 낸 뒤 국민의 의견을 듣겠다며 ‘소통 행보’를 벌여왔다. 대담집은 대선 공약집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지만 그는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해왔다.

안 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출마 의사를 공식화했지만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아 보인다.

우선 정치 경험이 전무한 만큼 국정운영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뚜렷한 국정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과 로드맵을 마련해 국민을 설득하는 것도 시급한 상황이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비전과 이를 뒷받침할 인적 네트워크 등 준비 상황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결선투표 없이 후보로 확정된 이후 지지층이 결집하는 컨벤션효과가 나타나면서 일부 여론조사에서 안 원장을 추월하고 있는 것도 그로서는 상당한 부담이다.

이미 일정 부분 진행이 된 검증 공세도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이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응하느냐도 안 원장의 대권 행보의 변수가 될 전망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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