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고르비, 1986년 회담 결렬됐지만, 이듬해 중거리핵 폐기합의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만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서울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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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사전 조율을 거쳐서 하기 때문에 ‘실패한 정상회담이란 없다’는 외교가의 통설과 배치되는 ‘노딜(no deal, 합의 없음) 서밋(summit·정상회담)’의 전례로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케네스 아델만 전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1일(현지시간)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트럼프의 실패한 하노이 회담이 우리 시대의 레이캬비크 회담이 될 수 있는 이유’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만났으나 아무 합의문 없이 돌아섰던 상황과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비교한 것이다.
198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던 레이건과 고르비는 이듬해 10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군축 협의를 위해 다시 무릎을 맞댔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레이건은 ‘모든 핵무기의 제거’를 돌발적으로 제의했고, 고르비는 이른바 ‘스타워즈’라고 불리는 미사일방어시스템에 대한 규제를 회담 내용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축협정 합의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두 정상은 결국 그 이듬해인 1987년 워싱턴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역사적인 ‘중거리핵무기 폐기협정’(IRNFT)에 서명했다.
레이캬비크에서의 실패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장관은 레이캬비크 회담 때 레이건의 ‘모든 핵무기 제거’ 제의가 후일 군축합의의 초석이 됐다고 주장했다.
또 폴리티코 기고문에서 아델만 전 대사는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이 이후 늘 “레이캬비크 회담이 모든 걸 바꿨다”고 말할 정도였다며 “동틀 무렵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고 강조했다.
아델만 전 대사는 레이캬비크 회담 이후 자신을 비롯한 미·소 협상팀 사이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든 실무논의가 이어졌다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다시 만나기 전에 실무협상팀의 탄탄한 기초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