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받는 군을 위하여] <10> ‘언어호봉제’ 안지켰다며 때리고 욕하고…

[신뢰받는 군을 위하여] <10> ‘언어호봉제’ 안지켰다며 때리고 욕하고…

하종훈 기자
하종훈 기자
입력 2015-10-25 17:48
업데이트 2015-10-2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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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야 정신 차린다” 악습 관행화… 지휘관들 인권의식 바꿔야

“언어 호봉제를 제대로 구사하지 않고 말을 얼버무려 때렸습니다.”

지난 6월 28일 김포 해병 제2사단 공병대대 소속 지뢰탐지병 신모(20) 일병은 선임병들의 폭행 등 가혹행위를 견딜 수 없어 생활관 3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방모(22) 일병 등 가해자들이 밝힌 가혹행위의 이유는 신 일병이 ‘언어 호봉제’를 지키지 않아 말이 어눌했다는 것. ‘언어 호봉제’는 후임병이 대화할 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똑바로 하겠습니다’, ‘~를 알고 싶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등 5가지 말만 해야 한다는 해병대의 악습이다. 군에 입대한 지 1년도 안 된 20살 안팎의 젊은이들은 후임병에게 악습을 가르치겠다며 폭행과 가혹행위를 일삼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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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군 인권센터 주최로 열린 ’윤 일병과 기타 병영 인권침해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제’에 참가한 의문사 군인 유가족과 시민들이 희생자의 영정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지난해 8월 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군 인권센터 주최로 열린 ’윤 일병과 기타 병영 인권침해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제’에 참가한 의문사 군인 유가족과 시민들이 희생자의 영정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지난 5월 22일 해병대 2사단에 배치된 신 일병은 ‘군가를 부를 때 박자를 실수했다’, ‘말끝을 흐렸다’, ‘평소 뛰어다니지 않고 행동이 느리다’, ‘눈치가 없고 소리가 작다’, ‘선임병이 깨웠는데 일어나지 않았다’ 등의 이유로 방 일병 등 선임에게 수차례 맞았다. 특히 박모(20) 일병은 신 일병이 평소 예의가 없다는 소문을 듣고 샤워장까지 찾아아 샤워 중인 신 일병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이들에게 병영 내 폭행과 가혹행위는 소위 ‘군대생활 잘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투신자살을 시도한 신 일병은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쳤고 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는 가운데 결국 사단 본부로 전출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신 일병에 대한 가혹 행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이 문제는 영원히 묻힐 뻔했다.

이는 군 당국이 지난해 8월 육군 28사단 윤모 일병 폭행 사망 사건을 계기로 병영문화를 대대적으로 혁신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약속이 1년도 안 돼 공염불에 그쳤음을 의미한다.

25일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2012년부터 올해 7월까지 군 관련 인권침해 진정 사건 접수 건수는 586건으로 나타났다. 매년 140~180명이 군 당국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인권침해 문제를 외부에 호소한 셈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임내현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육군의 경우 병사들의 가혹행위는 73건으로 2013년의 41건보다 늘었다. 폭행사건은 2013년 554건에서 지난해 936건으로, 폭언 사건은 27건에서 56건으로 각각 늘었다.

하지만 군 당국은 이 같은 병영 사고의 문제를 현역병 입대율이 90% 가까이 높아지면서 군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부실자원’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며 개인의 문제로 의미를 축소하려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군의 한 관계자는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만 입대해 현역병 입대율이 낮았던 과거에는 그럼 가혹행위가 적었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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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병영 내에서 근절되지 않는 폭행과 가혹행위가 ‘병영문화 지체현상’과 인권 문제에 대한 군 수뇌부의 소극적인 대응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기본적으로 군의 인권 의식이 21세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20세기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국방부 조사본부장을 지냈던 윤종성 성신여대 교양교육대학 교수는 “일제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맞아도 싸다. 맞아야지 정신 차린다’는 식의 사고가 아직 군 문화에 남아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최병욱 상명대 군사학과 교수는 “상명하복이 절대적 가치였던 강압적인 옛날 모델이 군대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라며 “병영문화 지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군 지휘관들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시대 변화를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 특별위원회 소속인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은 “병영 내 구타나 가혹행위 자체의 횟수보다 그 범죄가 제대로 처리되고 있느냐가 문제”라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단죄받고 그 단죄의 효과를 통해서 다음에 범죄가 일어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군 당국이 병영 내 폭행 사건 등을 처리한 이후 후속 조치가 미흡하다는 점도 2차 피해를 키우고 있다. 임내현 의원이 군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육군에서 폭행사건 등의 가해 병사 144명 중 71명은 소속이 변경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사건이 벌어져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실효적으로 분리돼 있지 않아 피해 병사가 고스란히 보복을 당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앞서 가혹행위를 당하다 못한 신 일병은 지난 5월 29일 민간전문상담관에게 폭행 피해 사실을 고백했으나 소속 중대에 그대로 남게 되면서 또 다른 2차 피해의 대상이 됐다. 신 일병이 간부와 상담한 대화 내용은 함께 있던 동기생들과 같은 소속 부대 간부를 통해 중대 전체에 퍼졌다. 군 당국은 “폭행 사건 이후 집단 따돌림은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소속 부대 정모(21) 상병은 신 일병보다 한 기수 후임인 병사들에게 “신 일병을 보면 경례하지 마라”고 지시했다.

해병대사령부는 지난 7월 24일 신 일병 사건에 대한 전면 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재조사 결과 최초 2사단 헌병대에서 3명이라고 했던 가해자는 7명으로 늘어났다. 해병대는 해당 공병대대장을 비롯한 소속부대 간부 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고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2사단 헌병대를 포함한 3명을 부실 수사로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징계 결과 공병대대장은 근신 5일, 중대장은 감봉 3개월, 소대장은 근신 10일, 주임원사는 견책, 부소대장은 근신 5일의 징계에 그쳤고 행정관과 분대장은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다. 군 당국은 현재 사단장에 대한 징계를 검토하고 있고 헌병대장에 대한 형사사건을 진행 중이지만 군의 부실 수사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여전하다.

윤 교수는 “군 지휘관들은 아직도 병영 내 폭행·가혹행위를 대부분 범죄가 아닌 ‘사고’라고 부른다는 점이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군은 초동 수사부터 전문가나 가족의 출입을 제한하고 자체적인 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해 버리는 관행을 반복한다”며 “지난번 ‘윤 일병 사건’ 당시처럼 군 부대에 들어갈 권한과 능력이 없는 유족이 군의 거짓 주장을 뒤집기는 힘들다”고 지적했다.

임태훈 군 인권센터 소장은 “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더이상 군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군이 아닌 외부에 이를 감시하기 위한 한국형 국방 옴부즈맨제도를 도입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2015-10-26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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