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 항상 촐랑대면서 웃겼잖아요.자기 자신도 나는 촐랑대면서 웃길테니 형님은 무뚝뚝하게 나가라고 나한테 그랬고… 하늘에서 잘 쉬었으면 좋겠어요.”
29일 유명을 달리한 코미디언 백남봉(본명 박두식)에 대해 명콤비이자 라이벌이던 남보원(74)은 이 같은 말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한달 전에 병문안 갔을 때에는 건강했었는데…”라고 말문을 흐리며 “그때 ‘빨리 건강 회복해라.니가 있어야 내가 있는 것 아니냐.니가 있어야 힘이 난다’고 말해줬었다.(백남봉이) 나한테 ‘염려하지 마라 곧 회복될테니 같이 일하자’고 그랬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60년대 후반 이후 40여년간 원맨쇼와 성대모사에 있어서 한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며 때로는 라이벌로,또 때로는 콤비로 인기를 모았었다.
고인보다 3살 연상이자 선배이기도 한 그는 “(백)남봉이와는 예능 극단 새나라쇼단에서 처음 만났다.지나 나나 초라할 때 만나서 이후로 참 친하게 지냈었다“며 “남들이야 우리보고 서로 라이벌이라고 그랬지만 우리는 각자의 아이들이 우리를 큰아버지,작은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고 했다.
“우리 집에 놀러오기도 하고 또 그쪽 집에 놀러가기도 하면서 서로 코미디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나는 이런 소재를 가지고 있으니 형님은 한오백년 같은 민요 한번 해보쇼’ 이런 식으로….남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같이 노력했었죠.”
40년 넘게 쌓아온 우정만큼 두 사람은 함께 만들어온 코미디 인생에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공유하기도 했다.
1985년 함께 평양공연에 가서 겪었던 고생담을 말하던 남보원은 어려웠던 초창기 시절 새나라쇼단에서 함께 일하던 때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한번은 방송 녹음을 갔다가 무대에 올라 팔도사투리를 가지고 쇼를 했는데 반응이 영 별로였어요.나는 시조를 사투리로 바꿔서 공연을 했거든요.알고보니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백남봉이 자기 장기인 ‘김치 마라톤’을 사투리로 풀어서 한참 웃기고 내려갔던거에요.그래서 내가 ‘사투리로 (공연) 하기 전에 미리 말하라’고 혼을 내기도 했었죠.”
남보원은 백남봉과의 관계에 대해 ‘우정의 라이벌’이라는 표현을 쓰며 고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안타까운게 참 많네요.서로 도움도 주고 또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도 해서 우리는 서로를 ‘우정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했어요.둘다 노력파라서 경쟁하다보니 각자 발전을 할 수도 있었고.그 친구(백남봉) ‘웃음의 배달부’로 평생 남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애쓰다가 저세상으로 간 거에요.저 세상에서 잘 쉬었으면 합니다.”
연합뉴스
폐암투병 코미디언 백남봉 별세
(서울=연합뉴스)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본명 박두식)이 29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71세.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사진은 지난 1985년 9월 평양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예술공연단의 일원으로 방북하는 백남봉씨 모습. 왼쪽은 남보원씨.
(서울=연합뉴스)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원로 코미디언 백남봉(본명 박두식)이 29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71세.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사진은 지난 1985년 9월 평양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예술공연단의 일원으로 방북하는 백남봉씨 모습. 왼쪽은 남보원씨.
29일 유명을 달리한 코미디언 백남봉(본명 박두식)에 대해 명콤비이자 라이벌이던 남보원(74)은 이 같은 말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한달 전에 병문안 갔을 때에는 건강했었는데…”라고 말문을 흐리며 “그때 ‘빨리 건강 회복해라.니가 있어야 내가 있는 것 아니냐.니가 있어야 힘이 난다’고 말해줬었다.(백남봉이) 나한테 ‘염려하지 마라 곧 회복될테니 같이 일하자’고 그랬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60년대 후반 이후 40여년간 원맨쇼와 성대모사에 있어서 한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며 때로는 라이벌로,또 때로는 콤비로 인기를 모았었다.
고인보다 3살 연상이자 선배이기도 한 그는 “(백)남봉이와는 예능 극단 새나라쇼단에서 처음 만났다.지나 나나 초라할 때 만나서 이후로 참 친하게 지냈었다“며 “남들이야 우리보고 서로 라이벌이라고 그랬지만 우리는 각자의 아이들이 우리를 큰아버지,작은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냈었다”고 했다.
“우리 집에 놀러오기도 하고 또 그쪽 집에 놀러가기도 하면서 서로 코미디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나는 이런 소재를 가지고 있으니 형님은 한오백년 같은 민요 한번 해보쇼’ 이런 식으로….남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같이 노력했었죠.”
40년 넘게 쌓아온 우정만큼 두 사람은 함께 만들어온 코미디 인생에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공유하기도 했다.
1985년 함께 평양공연에 가서 겪었던 고생담을 말하던 남보원은 어려웠던 초창기 시절 새나라쇼단에서 함께 일하던 때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한번은 방송 녹음을 갔다가 무대에 올라 팔도사투리를 가지고 쇼를 했는데 반응이 영 별로였어요.나는 시조를 사투리로 바꿔서 공연을 했거든요.알고보니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백남봉이 자기 장기인 ‘김치 마라톤’을 사투리로 풀어서 한참 웃기고 내려갔던거에요.그래서 내가 ‘사투리로 (공연) 하기 전에 미리 말하라’고 혼을 내기도 했었죠.”
남보원은 백남봉과의 관계에 대해 ‘우정의 라이벌’이라는 표현을 쓰며 고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안타까운게 참 많네요.서로 도움도 주고 또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도 해서 우리는 서로를 ‘우정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했어요.둘다 노력파라서 경쟁하다보니 각자 발전을 할 수도 있었고.그 친구(백남봉) ‘웃음의 배달부’로 평생 남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애쓰다가 저세상으로 간 거에요.저 세상에서 잘 쉬었으면 합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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