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들 깨우다 군인 곤봉에 ‘참변’…18년 만에 첫 희생자로 인정
“데모 노래에서 힘이 느껴져야 한다며 다시 녹음하자던 의욕적인 동지였지요.”이세종 열사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 세력의 총과 곤봉에 쓰러진 첫 번째 희생자다.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의 나이는 불과 21살이었다.
그와 함께 봉기했던 김성숙(59·여)씨는 무장 군인들이 전북대로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구타하던 그때를 잊지 못한다.
‘운명의 날’ 하루 전인 17일 저녁. 김씨는 이 열사가 “데모 노래를 2부 합창으로 힘차게 다시 녹음하자”고 제안했던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녹음 작업은 저녁 늦게서야 끝이 났다.
불침번이었던 이 열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학생회 사무실과 등사실(유인물 인쇄소) 등에서 잠을 청했다.
18일 자정이 조금 지났을까. 여학생회 사무실 문을 누군가 다급하게 두드렸다.
김씨가 문을 열자 다른 강의실에서 자던 동지들을 일일이 깨우러 다니는 이 열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빛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하게 흔들렸고, 혼이 나간 사람처럼 이리저리로 뛰어다녔다.
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신군부 세력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북대학교에 물밀 듯이 들어와 학생들에게 철심이 박힌 곤봉을 휘둘렀다.
유독 동지들을 깨우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던 이 열사는 군인들의 표적이 됐고, 옥상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해 숨졌다.
그의 시신은 옥상에서 어스름이 깔린 아스팔트 바닥으로 무참히 내던져졌다.
김씨는 “경찰서 정보2과로 끌려간 수십 명의 학생 중 1명이 이 열사의 주검을 눈으로 보고 신원을 확인해줘야 했다”며 “이 열사를 보고 온 학생은 ‘세종이가 맞다’며 분노하고서 통곡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과 정부는 이 열사의 죽음을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이 열사가 5·18 첫 희생자로 인정받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인 광주에서 숨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이 열사가 희생된 지 18년 만인 1998년 10월에야 광주민주화운동 보상심의회의 결정으로 이 열사의 명예가 회복됐다.
그는 광주 북구 망월동 신묘역에 안치됐다.
전북대학교 학생들도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이 열사를 추모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 열사의 추모비는 전북대학교 민주광장에 마련돼 있고 매년 이맘때면 학생들이 추모행사를 연다.
추모비에는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는 비문이 적혀 있다.
비명은 이 열사와 ‘그날’의 기억을 함께 간직한 김씨가 정했다.
김씨는 “5·18 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의 부탁을 받고 추모비를 바라보며 곰곰이 비명의 문구를 고민했다”며 “세종이가 숨졌던 나이의 대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눈앞을 지나갔다. ‘세종이가 살아 있었다면 저들처럼 숱하게 좋은 날들을 보냈을 텐데. 얼마나 살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비문 문구를 정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정면으로 대응해 산화한 선배를 추모해주는 후배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며 “빛을 보지 못한 영웅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이야말로 역사와 나라를 이끄는 힘”이라고 힘줘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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