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화이트데이” 분위기 변화
최근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의 확산과 맞물려 상대방이 원치 않는 사랑 고백이 상습적이거나 집요하게 이뤄지면 ‘성추행’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이로 인해 남성이 여성에게 사탕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인 ‘화이트데이’(3월 14일)를 맞아 남성들이 고백에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번지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들은 지난달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이어 이번 화이트데이도 대대적인 이벤트 없이 조용히 보내려는 모습이다.‘사랑 고백은 남자가 먼저 하는 것’이라는 통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금까지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사람 없다”, “한두 번 차였다고 포기하지 마라”, “수차례 거절당했지만 끝까지 대시해 결혼에 성공했다”는 말이 훈훈한 미담으로 통했다. 하지만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부터는 과도한 사랑 고백이 ‘성추행’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됐다.
이에 사랑 고백을 준비했던 남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호소하고 있다. 은행원 이성준(32)씨는 13일 “화이트데이에 마음에 두고 있던 같은 지점 여직원에게 선물을 주려 했는데, 일방적인 사랑 고백처럼 느껴지면 성추행이 될 수도 있다는 주변의 조언을 듣고 포기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고백 성공과 성추행은 모 아니면 도”, “성추행이 되지 않는 사랑 고백 횟수를 법으로 정해야 한다” 등과 같은 말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통상 남자가 먼저 고백해야 한다’는 말이 성 고정관념을 심어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말 속에 ‘여성은 남성에게 고백을 받는 수동적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남자가 먼저 선물을 주는 행위 역시 ‘권위적인 남성 중심주의’에서 비롯됐다는 해석도 있다. 윤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남성은 여성에게 언제든지 좋아하는 감정을 고백할 수 있다는 인식은 위험하다”면서 “여성의 입장에서는 과한 사랑 고백을 또 다른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2018-03-14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