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잠 없는 멧돼지와 마주쳤다? 소리 지르거나 도망치지 마세요!
강원도 대관령 목장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오후가 되면 늘 진돗개 두 마리와 목장을 산책하곤 했다. 그래 봤자 워낙 넓어서(산이 3개) 전체의 5분의1도 돌기 힘들었다.한창 그 외로운 설원을 걷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소리 없이 멧돼지 한 무리가 내 5m쯤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족히 10여 마리는 될 성싶었다. 큰 것 3~4마리에 작은 새끼가 7마리 정도였던 것 같다. 그동안 말로만 이곳에 멧돼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 이렇게 직접 마주치기는 처음이었다.
멧돼지에 대해서는 저돌적이고 사납다는 선입견이 뇌리에 박혀 있는 터였다.
‘이 허허벌판에서 도대체 어디로 숨어야 한단 말인가.’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엎드려 있는데, 갑자기 철딱서니 없는 진돗개들이 마치 사냥감처럼 거대한 멧돼지들을 쫓기 시작했다. 멧돼지 쪽에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이는데도 일단 멧돼지들은 그대로 대열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언덕 위로 도망쳐 갔다. 개들 역시 최선을 다해 추격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다 언덕 중간쯤에서 갑자기 멧돼지들이 일제히 개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반격을 할 기세였다.
‘큰일 났구나. 저놈의 개들 때문에 나만 죽게 생겼네.’
눈 바닥에 코를 박고 곁눈질로 빼꼼히 언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개들은 멧돼지들의 기세에 눌려 슬금슬금 뒷걸음치다가 도망쳐 내려왔다. 멧돼지들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단 10분 동안 일어난 일이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호랑이에게 잡혀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난다고들 한다. 그 말이 이 경우에도 맞을지는 모르겠다. 내 지각은 생생했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처신은 초식동물인 멧돼지나 코끼리 정도만 적용될 뿐이다.
만일 곰이었다면 죽은 척해서는 살아나기가 더 힘들다고 한다. 이때는 최대한 고함을 치면서 뒷걸음질로 슬슬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일부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그때의 멧돼지 가족을 생각하면 두려움보다는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지금도 그들이 대를 이어서 무사히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최종욱 광주우치동물원 수의사 lovnat@hanmail.net
2011-11-0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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