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연금 받는 야구 감독”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현장에서 사라질 뿐이다.” 야구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국군체육부대(상무) 김정택(58) 감독 얘기다. 그가 이달 말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밴 그라운드를 떠난다. 1982년 상무 전신인 육군중앙경리단 초대 사령탑에 오른 지 꼭 30년 만에 정년 퇴임(서기관)을 맞는 것. 30년간, 그것도 한 팀에서, ‘파리 목숨’과도 비유되는 감독 자리를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그가 처음이다. 그는 상무의 특성 때문이라고 몸을 낮추면서도 ‘운명’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상무에서는 최삼환 배구 감독과 윤중오 배드민턴 감독이 조만간 그의 뒤를 이을 전망이다.김정택 야구 감독
누구나 그렇듯, 그도 당장은 시원섭섭할 터. 그렇지만 그는 “대한민국 야구 감독 중 유일하게 연금을 받는 사람”이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그의 색다른 이력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 감독과 야구의 인연은 다소 싱겁다. 부산 성남초교 시절 큰형이 외제 글러브를 사준 것이 계기이다. 부산중·고에서 투수로 활약하다 서울 대광고로 전학하면서 운동을 잠시 접고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구와의 끈은 이어졌고 당시 김재박(전 프로야구 감독)과 함께 뛰었다. 야구로 큰 빛을 보지 못한 데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 군인(단기 사관 육군 소위)의 길을 과감히 택했다.
7년 뒤 대위로 복무하던 1982년 육군중앙경리단이 창설되면서 선수 경험이 있는 그에게 초대 감독 지휘봉이 주어졌다. 인생의 전부가 된 야구와의 운명이 시작된 것이다.
경리단은 이듬해 육군체육지도대, 84년에는 모든 군인을 망라한 국군체육부대로 재편됐다. 자연스럽게 상무의 초대 감독에 올랐다. 그를 거쳐 간 제자들은 수두룩하다. 경리단 당시 장효조, 조종규, 정구선, 우경하 등 당대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있었고 이후 윤학길, 마해영, 양준혁에서 김광삼, 손시헌까지 함께 달렸다. 프로선수가 상무에 입대한 것은 1999년부터다.
김 감독의 성적은 화려하다. 무려 60차례나 정상을 밟았다. 1200경기 이상 출전해 승률이 7할 가까이 된다고 자부했다. 국내외에서 안 받아 본 상이 없고 국가대표 감독도 3차례나 지냈다. 그가 “유일하게 못 해 본 것이 프로야구 감독”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의 야구 철학은 군인 정신과 상통한다. ‘인간다운 행동’을 우선 강조한다. 평범한 얘기 같지만 경험상 이런 선수가 성공한다는 것. 또 투수력과 타력은 감독의 능력으로 한계가 있지만 수비와 러닝은 감독의 몫이라고 말한다. 서둘지 말고 경기를 풀어가라고 늘 주문한다.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것. 인생과도 비슷하단다.
그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대회가 있다. 2005년 네덜란드 월드컵(세계선수권). 2연패로 예선 탈락의 위기에서 캐나다에 4-5로 뒤지다 박정권(현 SK)의 극적인 3점포로 7-6으로 승리, 8강에 진출했고 8강에서 막강 일본을 꺾은 것이다. 당시 독도 문제가 불거져 반드시 이겨야 했던 경기였다.
결승에서 쿠바에 져 준우승했지만 극적인 상황의 연속이었다고 회상했다.
“아직도 경기에 나서면 질 생각은 없다.”는 김 감독은 “작은 일이라도 야구에 도움이 되고 싶다. 운명이었고 축복이었던 오랜 감독 생활의 노하우를 적절한 곳에서 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글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사진 대한야구협회 제공
●김정택 감독은
▲출생 1953년 2월 24일 부산 ▲학력 부산 성남초교-부산중·부산고-서울 대광고-경성대 ▲가족 아내와 첫째 아들(스탠퍼드대 박사과정), 둘째 아들(해군 대위) ▲취미 골프 ▲경력 1982년 육군중앙경리단 초대 감독. 84년 국군체육부대(상무) 초대 감독. 2002~2010년 퓨처스리그 8회 연속 우승. 각종 국내대회 통산 60회 우승. 2005년 국제야구연맹 선정 ’올해의 감독상’
2011-06-23 29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