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를 더듬는 떨림’ 한국 첫 전시
학교에서 버려지는 책상을 설치미술품으로 만들어 코소보 내전의 비극을 기록한 페트릿 할릴라이의 ‘철자법 책’ 시리즈.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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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코소보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내전의 총탄을 피해 이탈리아로 입양된 작가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기록하고 기억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게 생겼다. 피난 입양아에서 유럽에서 주목받는 예술가로 성장한 페트릿 할릴라이(33)는 그렇게 2015년부터 설치·조각 시리즈 ‘철자법 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남미 국가에서 나고 유년기를 보냈지만 유럽에서 미술을 배운 작가의 눈길은 ‘문화’라는 옷을 입은 권력의 지배구조에 쏠렸고,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작가의 눈에는 특히 부조리한 사회구조가 밟혔다. 현대미술 중심지로 떠오른 독일 베를린에서 창작 세계를 펴고 있는 이 젊은 작가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작품을 들고 한국을 방문했다.
네덜란드 출신 작가 조라 만은 ‘방패 시리즈’에 아프리카 토착부족의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문화를 녹였다. 베네수엘라 출신 솔 칼레로는 회화 ‘남쪽의 학교’를 통해 권력의 지배구조에 집중했다.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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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풍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는 솔 칼레로.
아라리오갤러리가 올해 여름 전시로 서울 삼청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그룹전 ‘척추를 더듬는 떨림’은 각기 국적과 성장 배경은 다르지만 현재 베를린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 4명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공동체에 대한 개념을 저마다 독특한 예술 세계로 풀어내며 창작자가 품은 에너지를 마음껏 쏟아낸다.
내전을 피해 유년기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할릴라이는 종전 후 방문한 코소보의 한 학교에 버려진 책상에서 내전의 흔적과 아픔을 발견했다. 그는 아이들이 낙서가 고스란히 담긴 책상을 대형 설치물로 만들었다. “사소하게 잊히는 학생들의 낙서를 통해 우리 개인의 기억이 상실되거나 희미해지는 것을, 나아가 한 사회의 역사가 왜곡돼 기록되는 것을 보존하는 행위”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네덜란드 출신 조라 만(40)은 아프리카에서 보낸 유년기를 토대로 제작한 작품 ‘코스모파기’를 선보인다. 해양보호 활동에도 참여한 적 있는 작가는 케냐의 해변과 수로 등에 버려진 플라스틱 슬리퍼로 대형 커튼을 만들어 갤러리에 내걸었다. 작가는 “인도양의 가장 큰 오염원이기도 한 슬리퍼들은 인류의 욕망이 되돌릴 수 없는 환경 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공동체적 인식을 강조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아프리카 토착부족의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문화를 녹인 ‘방패 시리즈’도 함께 공개했다.
그룹전 ‘척추를 더듬는 떨림’에 참여한 작가들이 아라리오갤러리 삼청에서 자신들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출신 솔 칼레로(37)의 작품 중에서는 건축구조적 요소에서 권력의 지배구조를 표현한 회화 ‘남쪽의 학교’가 눈에 띈다. 유럽 열강이 남미 국가들을 지배했을 때 남긴 ‘유럽풍’ 건축물들을 재해석해 캔버스에 담았다. 그는 “사회가 특정 문화를 빌려 권력의 지배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영국 작가 카시아 푸다코브스키의 설치미술작품 ‘지속성 없는 없음’.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2019-07-23 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