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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다는 딸과 공감하는 엄마…무대 위에 오른 안락사

죽고 싶다는 딸과 공감하는 엄마…무대 위에 오른 안락사

류재민 기자
류재민 기자
입력 2024-03-18 20:36
업데이트 2024-03-1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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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Bea’에서 8년간 원인 모를 무기력증으로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비(오른쪽)가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한 뒤 간병인 레이(가운데)와 비의 엄마 캐서린(왼쪽)이 요란한 파티를 벌이고 있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비Bea’에서 8년간 원인 모를 무기력증으로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비(오른쪽)가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한 뒤 간병인 레이(가운데)와 비의 엄마 캐서린(왼쪽)이 요란한 파티를 벌이고 있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죽고 싶다”는 한마디가 진실로 절실한 사람이 있다. 병명도 모른 채 만성 체력 저하 증상으로 8년째 침대에서 지내는 비의 이야기다. 젊은 나이에 이대로 얼마나 더 이렇게 살아가야 할지 캄캄한 앞날을 견디자니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비에게 죽음은 감옥 같은 육신을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는 수단이다.

주어진 삶은 고통스럽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처지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류는 오랫동안 죽음을 인간의 손에 의해 이뤄져서는 안 되는 영역으로 간주해왔지만 최근 들어 이와는 다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죽음을 선택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사회가 분명히 다뤄야 할 의제이기도 하다.

‘비bea’는 연극으로서 안락사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삶에 그다지 희망이 없는 비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비와 같은 불치병 환자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비를 지켜봐야 하는 가족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한 번쯤 고민하게 한다.

비에게 어느 날 공감 능력이 탁월한 간병인 레이가 등장한다. 레이에게 연애도 임신도 불가능한 고충을 털어놓던 비는 레이에게 부탁해 엄마에게 줄 편지를 대신 써달라더니 깜짝 놀랄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에게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며 안락사를 부탁한 것. 그러나 엄마는 살인은 불법이라며 비가 했던 것처럼 레이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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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왼쪽)의 엄마 캐서린(오른쪽)은 안락사를 청하는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진솔한 소통을 통해 서서히 마음을 이해해간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비(왼쪽)의 엄마 캐서린(오른쪽)은 안락사를 청하는 딸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진솔한 소통을 통해 서서히 마음을 이해해간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죽고 싶은 딸과 살게 두고 싶은 엄마의 양보할 수 없는 생각의 간극은 레이를 통해 조금씩 좁혀진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무거운 주제지만 비의 천진난만함과 레이의 생기발랄함이 만난 덕에 무겁지 않게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때론 대책 없이 유쾌하기까지 한 작품은 안락사 문제를 마냥 어두운 분위기 속에 터부시하는 대신 다양한 감정으로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의도가 담긴 듯하다.

죽고 싶으면서도 남들이 느끼는 욕망과 감정에 솔직해져 보고 싶은 비의 대사와 행동들은 살아있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세상의 규범이 자유의지를 지닌 영혼을 속박할 수 있는지, 인생의 나머지가 죽음뿐이라면 죽을 권리를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지 등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공감이라는 낯선 현상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사회가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연극적으로 신선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공연 막바지 감옥 담장처럼 비의 방을 감싸던 벽이 열리고 사과나무가 선 정원이 나타나는 무대도 인상적이다. 비가 갇혀있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자유를 얻는 것 같기도, 죽음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엄격한 장벽이 허물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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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왼쪽)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비의 속마음에 진정으로 공감하면서 비의 삶을 기존과 다르게 바꿔놓는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레이(왼쪽)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비의 속마음에 진정으로 공감하면서 비의 삶을 기존과 다르게 바꿔놓는다.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5년 만에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이 작품은 영국 국립극장 출신 극작가 겸 연출가 믹 고든의 대표작이다. 이준우 연출은 “우리 삶을 충실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알고 이해하고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며 작품이 전하는 공감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메시지도 메시지지만 무엇보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어야 작품의 매력이 살아난다는 점에서 연극적 가치도 남다르다.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에서 24일까지. 비는 이지혜·김주연, 레이는 강기둥·김세환, 엄마 캐서린은 방은진·강명주가 맡았다.
류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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