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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본 듯한 꼰대… 된장향 나는 북유럽 막장

어디서 본 듯한 꼰대… 된장향 나는 북유럽 막장

오경진 기자
오경진 기자
입력 2024-04-03 01:02
업데이트 2024-04-03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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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서 막 오른 연극 ‘욘’

노르웨이 헨리크 입센 희곡 원작
에드바르 뭉크 작품서 영감 얻어
고전 외피 벗고 현대적 감각 해석

자녀에게서 세월 보상 찾는 엄마
과거의 영광 자랑하기 바쁜 아빠
웃기고 짠한 노욕… 기시감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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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개막해 이달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욘’에서 배우 이남희가 주인공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을 연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지난달 29일 개막해 이달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욘’에서 배우 이남희가 주인공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을 연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몹시 준엄한 목소리로 침까지 튀기며 성을 내는 아버지. 원래 같았으면 무서움을 느껴야 했을 텐데 왜인지 웃음이 먼저 튀어나온다. 한껏 격앙된 투로 지나간 영광을 되뇌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독으로 가득찬 말년의 한 단면을 엿보게 된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연극 ‘욘’이 막을 올렸다. 딱딱하고 무거운 고전의 외피를 벗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했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만년에 쓴 희곡이 원작이다. 2024년의 한국과는 상당한 시공간적 거리가 있음에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늘 아침에 봤던 드라마와도 같은 기시감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엘하르트는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야. 그에겐 내가 바라는 걸 해야 할 의무가 있어!”

욘의 아내이자 엘하르트의 생모인 귀닐의 이 대사에서 조금 뜨끔한 부모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헬리콥터’에 비유되곤 하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강한 집착. 이게 다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고 합리화하지만 자식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나간 세월의 보상을 아들에게서 찾으려는 어머니. 이때 사랑은 절대적인 ‘아가페’가 아니라 자식이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부채’ 정도로 격하된다.

“난 백만장자가 될 수도 있었어!”

보르크만 가문의 가장인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연극 내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제일 안타깝고 웃긴 인물이다. 대사 없이 무대를 늑대처럼 어슬렁거리던 그는 입이 트인 뒤로는 무지막지할 정도로 대사를 쏟아 낸다. 배우 이남희(62)의 입에서 침이 튀는 모습이 눈에 선할 정도이지만 그리 귀담아들을 만한 말은 없다. 다 ‘과거엔 내가 이만큼 잘나갔다’는 이야기다. 시쳇말로 ‘꼰대’의 완벽한 현현.

모든 걸 잃고 몰락한 현재에도 그는 여전히 명예를 되찾을 날을 꿈꾸고 있다. 욘에게서 우리는 정치 기사에서 많이 봤던 한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노욕’. 욘이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관객이 웃음을 터뜨리는 건 현실 어디선가 많이 봤던 장면이라서다. 또 현실에서는 그런 꼰대들 앞에서 쉽게 웃을 수 없기에 컴컴한 극장 안에 몸을 숨겼을 때 비로소 그들을 향한 조소가 피어오르는 것이리라.

입센과 함께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에드바르 뭉크(1863~1944)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무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어딘지 쓸쓸한 느낌을 준다. 무대 뒤 설치된 디지털 창문 밖으로는 펑펑 눈이 내린다. 아들 엘하르트는 꿈과 미래를 찾아 더 큰 세계로,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던 아버지 욘은 죽음이라는 무한의 세계로 떠난다. 두 남자를 두고 각기 다른 의미와 방식으로 지독히도 경쟁했던 여성 귀닐과 엘라는 비로소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누군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덧없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걸까. 공연은 오는 21일까지.
오경진 기자
2024-04-03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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