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 하재봉의 영화읽기 - 여배우들

Movie | 하재봉의 영화읽기 - 여배우들

입력 2010-02-21 00:00
업데이트 2010-02-2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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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앞에 성별을 구분하는 더 정확하게는, 여성을 구별하는 접두사를 넣는 것이 여성에 대한 성적 차별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어서 요즘은 여성작가, 여류화가 이런 식의 구별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남배우’라는 단어는 없어도 ‘여배우’라는 단어는 있다. 남자 배우들과는 다르게 여배우들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고 대중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배우’라는 단어 속에 성적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고현정의 말에 따르면, 자기들 하고 싶은 것 다 하는, 소위 까칠하고 성깔 있다는 선입관이 ‘여배우’라는 단어 속에 있을 수도 있지만, ‘여배우’라는 단어를 대중들은 사랑한다. 그 단어는 범속한 삶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많은 꿈과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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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배우들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다. 대중들은 화면 앞에 드러나 있는 그들의 익숙한 이미지보다 화면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삶을 궁금해 한다.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은 20대 초반에서 60대에 이르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배우 여섯 명을 모아 놓고 그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픽션과 넌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진솔한 이야기들은, 관객들을 매혹시킨다. 그들 자신의 상처까지도 드러내 놓으면서(물론 가장 민감한 부분까지 공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이미숙이 이미숙을, 고현정이 고현정을, 최지우가 최지우를 연기하게 만든다.

200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잡지 보그 코리아에서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표지 모델로 각 세대를 아우르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섯 명의 여배우들을 섭외한다.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그들을 힘겹게 모아 놓았지만 그들 서로의 신경전이 날카롭게 펼쳐지고, 일본에서 오기로 한 보석은 폭설 때문에 오지 못한다. 보석을 기다리는 동안 여섯 명의 여배우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조금씩 취해 가는데, 술은 그들의 마음을 열게 만들어 평소에는 하기 힘들었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여배우들>이 신변잡기 가십류의 연예 프로그램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짜인 각본 아래 진행되고 있으며, 카메라의 시선이 자극적 선정적이 아니라, 본질적, 탐구적이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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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스튜디오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60대 여배우 윤여정이다. 약속 시간인 5시를 착각해서 1시간 일찍 도착한 그녀는, 후배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가장 가까운 후배인 고현정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 전화를 한다. 촬영 스튜디오 근처가 집인 고현정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전화를 받고 금방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그녀는 소파에 엎드려 휴식을 취한다. 여배우, 패션잡지, 청담동 스튜디오, 샴페인 이런 소도구들의 힘을 빌려 <여배우들>의 셋팅은 관객들에게 일상이면서도 일상이 아닌 어떤 공간을 만들기 시작한다,

드라마 <에덴의 동쪽> 촬영분장 그대로 달려온 이미숙이 도착하고, 해외 화보 촬영을 마치고 귀국해서 시차 적응을 못하는 김민희, 박찬욱 감독의 <박쥐> 후시 녹음을 마치고 송강호와 통화하고 있는 김옥빈 등이 나타난다. 성격이 예민한 최지우는 스튜디오 주차장까지 와서 기다리는 일본 팬들에 둘러싸인다. 윤여정은 까마득한 후배인 김민희나 김옥빈의 얼굴을 몰라 이미숙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그들은 대화 중에 각자 자신이 출연했던 작품을 자연스럽게 거론하며 논픽션과 픽션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카메라의 플래시를 받고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고 싶은 여배우들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모이자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시작된다. 화보 촬영을 위해 준비된 의상을 입어보면서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옷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다. 가장 팽팽한 대결은 고현정과 최지우다. 동년배인 그들은 서로 까칠하게 시선을 주고받는다. 빈 방에서 고현정이 없는 줄 알고 전화로 그녀의 험담을 늘어놓던 최지우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눌러 고현정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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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석과 여배우라는 컨셉트로 진행되던 화보 촬영은 일본에서 오기로 한 보석이 폭설로 도착하지 않자, 밤늦게까지 진행된다. 스태프들은 “이건 크리스마스의 악몽이야”를 외치고 안절부절하지만, 테이블에 모인 여섯 명의 여배우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파티 분위기를 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한 그들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이야기가 꼭 새로운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이미 연예뉴스나 TV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들이다.

<여배우들>이 빛나는 것은 카메라가 여배우들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 속으로 들어갈 때이다. 방송국에서 출연료를 깎자고 할 때 피부가 거친 윤여정은 자신의 피부 때문에 더 주장하지 못하고 출연료 삭감을 받아들인다거나, 결혼에 실패했을 때 그 이유에 대해 상대편(우리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다)에서 결벽증이 있네 등등 떠들고 다닐 때도 실제로는 그 남자에게 차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까지 다 까발린다.

데뷔작인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로 시체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받은 윤여정이지만 이제는 주름지고 까칠한 피부가 돋보이는 윤여정은 연륜 속에 시니컬한 맛을 숨기며 성질 급한 이미숙을 다독여가면서 후배들과의 대화를 이끈다. 아버지가 누구라는 등 소문이 많았던 이미숙은 “내가 출생의 비밀이 있잖아”라는 말로 자신의 사생활을 까발린다. 고현정 역시 자신의 이혼을 대화의 소재로 내놓는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은 이른바 돌싱이고,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은 아직 미혼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여자이고 또 배우이다. 이 공통점이 그들을 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배우들>이 더 재미있기 위해서는 실제 캐릭터를 넘어 허구의 캐릭터로 깊숙이 연결되든가, 아니면 실제의 캐릭터 깊숙이 파고들었어야 했다. 카메라는 표면에 닿아 피부의 감촉을 전해주는데 그친다. 고현정의 이혼과 뒤얽힌 자신의 깊숙한 속내 이야기나, 마음이 가는대로 솔직하게 살고 싶다는 김민희의 한 단계 더 진전된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즉 카메라는 여배우들의 사생활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변죽만 올리고 멈춰버린다.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실제 인물의 캐릭터를 파고 들 수 없었다면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송곳처럼 파고드는 맛이 있어야만 했다. <여배우들>은 그것이 부족하다.

글_ 하재봉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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