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장진호·백마고지 전투 치른 참전용사 박학관씨
“9대 독자지만 한국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어.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오른쪽 팔에 총알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또 싸웠어.”참전용사 박학관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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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6·25 발발 당시 부산 무선중학교 4학년이었지만, 7월 초순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오자 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는 9대 독자로 대를 이어야 한다며 극구 만류하는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같은달 중순 부산 문현동의 육군 23연대에 자원입대했다. 당시 일본 도쿄에 주둔해 있던 미 7사단으로부터 ‘한국 사정을 잘 아는 군인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았던 23연대는 박씨를 일본으로 보내 미군에 배속시켰다. 일본에서 2개월간 기초 훈련을 받은 후 박씨가 참여한 첫 전투가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미 해병대의 뒤를 이어 인천에 상륙한 박씨의 미 7사단 야포대대는 그대로 내달려 화성, 오산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박씨는 “10만명 이상의 인민군을 포로로 잡았다.”면서 “같은 해 9월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쉼없이 북진해 11월에는 지금의 양강도 혜산까지 밀고 올라갔다.”고 회상했다. 이어 “당시 이대로 통일이 되는 줄 알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박씨의 부대가 개마고원 부근의 장진호에서 숙영할 때 중공군이 습격해 왔다. 미국의 뉴스위크지가 훗날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한 전투였다. 중대원 150명 가운데 박씨를 포함해 고작 50여명만 살아남았고 박씨는 7사단 해병사령부가 있는 고토리 비행장에서 12㎞를 뛰어간 후 중공군의 총알을 오른팔에 맞았다. 박씨는 3주간의 치료를 받은 후에도 다시 부대로 돌아갔다. 그는 “나라를 지키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다.”고 격하게 말했다.
박씨는 ‘미제침탈’ ‘북침’ 등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6·25관련 주장들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조차 잘못된 얘기들이 나오니 안타깝다.”면서 “6·25를 잊지 말고 제대로 조명하는 것이 당시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과 전세계에서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강조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2010-04-20 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