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위기 ‘해결사’ 역할 제대로 할까 기대 반 회의 반
ESM의 재원 규모는 5천억 유로다. 이 가운데 800억 유로는 17개 유로존 회원국이 경제 규모에 따라 향후 2년간 5회에 걸쳐 현금으로 분납한다. 나머지 4천200억 유로는 회원국 정부들이 지급보증의 형태로 제공한다.EFSF 자금 잔액분 등을 합치면 ESM의 자금은 7천억 유로로 늘어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실제로 대출이 가능한 규모는 5천억 유로다. 나머지는 만기 채권 상환 등에 필요할 경우 사용할 수 있도록 보유하는 일종의 비상금인 이른바 ‘초과 보증’의 형태로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SM은 이 재원을 담보로 자체 채권을 발행해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 구제금융 대상국 또는 구제를 받아야 할 위험에 처한 나라들에 시장 금리에 비해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게 된다. 이는 기존 EFSF의 기능과 마찬가지다.
룩셈부르크에 본부를 둘 ESM의 초대 총재는 독일 출신인 클라우스 레글링 현 EFSF 총재가 맡는다. 실무 업무도 기존 EFSF 조직이 승계한다. 현재 약 40명인 EFSF 직원은 ESM과 통합되면서 내년 여름까지 약 1백 명으로 늘어난다.
이런 점에서 ESM은 유로존 위기를 타개할 ‘바주카포’로 출범하지만 ‘재정적 실탄’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무기인 셈이라고 뉴욕 타임스는 평가했다.
◇ 자본금과 기능 확대 논란 = 유로존은 당초 ESM 출범을 처음 논의할 당시엔 5천억 유로의 재원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유로존 3위와 4위 경제국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흔들리면서 5천억 유로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유로존 안팎에서 쏟아져 나왔다.
민간 금융기관이나 경제연구소 뿐만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회원국의 현금 출자와 보증을 최소 1조~1조 5천억 유로로 늘려야 ESM이 금융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납입 자본금 확대가 어렵다면 민간 참여와 지급보증 등 레버리징을 통해 2조 유로로 자본금을 증액할 경우 회원국들의 추가 출연 없이 가용재원을 4배로 확대할 수 있다는 방안도 최근 제시됐다.
그러나 이른바 ‘북유럽’ 회원국들은 현재의 재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독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ESM에 대한 독일의 분담액 보증 규모가 1천900억 유로를 넘을 수 없다는 점을 독일 정부가 분명히 하면서 재원 증액 문제는 일단 수면 밑으로 잠복했다.
ESM의 기능과 관련한 회원국 간 최종 합의도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초 EU는 지난 6월 정상회담에서 ESM에 은행 직접 대출 기능을 주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유로존 구제기금의 대출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주는 것이다. 돈을 빌리는 주체가 정부이므로 갚을 책임도 정부에 있다. 금융위기 등 특수한 상황에서 은행이나 기업을 지원해도 일단 정부를 거쳐 나가게 돼 있다. ESM이 은행에 직접 대출해주면 정부 채무 규모는 전혀 늘어나지 않게 돼 이는 스페인으로선 가뭄에 단비 같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독일과 덴마크 등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최근 ESM 출범 이전에 결정된 구제금융의 경우 은행에 주는 것이라도 정부가 상환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해 분란이 일고 있다.
또 6월 정상회의는 ESM이 시장에서 위험국 국채를 2차시장에서도 매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으나 이 조항 역시 “유로존 차원의 통합 금융감독 시스템이 마련된 이후”라는 단서에 걸려 당장에는 실행이 어렵다. ESM은 은행면허도 가질 수 있어 유럽중앙은행(ECB)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국채 매입 등에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을 실제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독일 등 주요 북유럽 국가와 ECB 내 매파들의 협조를 얻어내는 일이 현재로선 쉽지 않다.
◇기대와 회의 교차 = 이런 한계들 때문에 ESM이 유로존 위기의 소방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론을 펴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한스 베르너 진 독일 Ifo 경제연구소장은 “ESM은 채무위기 해결의 근본 대책이 되지 못하며 위기 폭발을 지연시켜주고 위험국 국채 보유자들이 현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배드 뱅크’역할을 하는데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골드만 삭스는 ESM의 국채 발행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른바 ‘대체 효과’가 발생해 프랑스, 벨기에 등 일부 핵심국가 국채의 스프래드(독일 국채와의 수익률 차이)가 커지는 등 유로존의 ‘숨겨진 취약점들’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골드만 삭스는 또 ESM의 차입이 바로 회원국 정부의 부채로 계상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부채를 늘리는 효과가 있어 결국 우량국가들의 부담도 커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다른 전문가들은 기존 EFSF 체제하에서도 이런 ‘대체효과’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며, 회원국 부채의 간접적 증대 효과 역시 여러 해에 걸쳐 나눠 나타나므로 실질적 타격은 미미하다며 반박했다.
ESM을 긍정 평가하는 전문가들은 지난달 12일 독일 헌법재판소가 ESM에 대해 합헌이라고 결정하자 국제 금융시장이 일제히 폭등한 점 등을 들며 ESM의 역할에 대해 낙관하고 있다.
레글링 총재는 ESM의 구조와 핵심 자본을 포함해 모든 준비 상황에 비춰볼 때 “EFSF가 지금까지 시장에서 거둔 것과 마찬가지로 성공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EFSF는 2010년 6월 출범 이래 지난 2년간 거액의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 그리스 등을 지원해줬으나 아직 손실은 전혀 입지 않았다. 또 향후 등급 강등 가능성이 거론되기는 했지만 무디스 등은 아직 EFSF 채권에 트리플A 등급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글링 총재가 EFSF 출범 당시 “EFSF의 기금을 실제 사용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시장을 안정시킬 것”이라고 자신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예상이 빗나갔다는 점에서 ESM의 앞날도 낙관할 수 만은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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