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3) 협치의 제도화
역대 모든 정부는 ‘협치’를 약속했고 정국이 꼬일 때면 ‘여야정 협의체’ 구성이 단골 화두로 등장했다. 민생을 위해 여야정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대통령과 국회, 여야 사이 팽팽한 긴장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고 여야정이 실제 한자리에 모이기는 말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지난 9일 여야정은 ‘국정협의회’ 첫 실무협의를 열고 의제 등을 논의했다. 12·3 비상계엄 직후 우원식 국회의장이 협의체를 제안했지만 공전을 거듭하다 한 달여 만에 겨우 실무협의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의제는커녕 다음 협의 일정도 정하지 못했다.
#갈수록 대화 사라지고 요구만
지도부·당론에 휩쓸리는 경향
공통공약 정작 협상 땐 딴소리이런 양상은 국정상설협의체를 공약했던 문재인 정부를 비롯해 과거 정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정이 야당의 협의체 참여를 끌어내는 과정에서 여야가 서로 다른 요구조건을 내걸고 힘겨루기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마주하는 영수회담도 역대 정부마다 추진은 됐지만 대부분 일회성에 그쳤고 그나마도 빈손으로 끝났다.
협치를 강조해 온 여야 중진 의원들은 우리의 정치 제도와 의회 구조상 여야정 협의체를 운영하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고 입을 모은다. 정례화·법제화 전에 머리를 맞대는 것조차 지금은 어려운 구조라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 초대 특임장관과 박근혜 정부 청와대 정무특보 등을 지낸 주호영 국회부의장은 20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어느 한쪽의 주장만으로는 정책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조금만 입장을 좁히면 협의가 가능한 사안들도 있어 서로 귀 기울이고 경청하면 훨씬 좋은 방향으로 같이 갈 수 있다”면서도 “우리 정치 풍토상 ‘타협하면 지는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해 모든 당사자들이 양보하지 않으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여당 원내수석부대표와 야당 원내대표를 지낸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여야 협상은) 100 중에 51 이상을 여러 번 가져가는 식으로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100이 아니면 0처럼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대선 과정에서 각 당이 공통으로 제시한 공약조차 막상 협의 테이블에 올리면 각론에서 차이가 너무 크다”며 “세부사항을 두고 입장이 너무 갈려 일치를 보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설명했다.
두 의원은 점차 여야가 대화하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여야 모두 당의 노선과 지도부의 결단에 좌우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 말하는 해결책은 달랐다.
주 부의장은 “여야를 떠나 다수당이 좀더 양보하고 상대를 존중해 줘야 하는데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했다는 것만으로 일방적으로 국회를 움직이려고 하니 접점을 찾을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박 의원은 “여야정 협의체는 야당에 정책 결정의 참여 기회를 주는 명분을 주면서도 결국 정부·여당에 유리한 테이블인데 이번 정부에선 너무 소극적이었다”며 “협치는 칼자루와 열쇠를 쥔 쪽에서 손을 내밀고 양보해야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 양보와 존중이 협치의 첫걸음
내각제 英·日, 야당이 주요 파트너
실무급 당정협의부터 체계 갖춰야즉흥적으로 제안되는 여야정 협의체도 문제로 지적된다. 박 의원은 “여야가 서로 협치하자고 반복적으로 얘기는 하지만 중요한 정치 쟁점이나 현안이 생기면 뒤로 밀리는 등 협치 자체가 정치권의 액세서리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여야정이 모이지만 결국 야당을 들러리나 구색 맞추기용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어 성과를 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대통령제와 ‘승자독식’ 구조의 의회가 운영되는 미국은 상·하원 위원회를 중심으로 의정활동이 이뤄지고 의원 개개인의 독립성도 보장되는 편이다. 반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정당의 입장을 정하는 의원총회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라 개별 의원들의 활동폭이 상대적으로 넓어 협치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과 영국 등은 내각이 발의한 법안을 여당이 사전에 심사하고 당 주요 기구 논의를 잇따라 거쳐 동의를 얻은 법안만 국회에 제출한다. 게다가 의회가 언제든 내각에 대한 신임을 철회할 수 있어 내각은 야당을 중요한 파트너로 대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야당이 차기 집권을 대비해 구성한 그림자 내각(섀도 캐비닛)이 정부로부터 정보를 공유받기도 하고 협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당정협의부터 보다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2018년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는 “한국은 고위 레벨의 당정협의가 중심이 돼 부처별 당정협의가 유기적으로 열리지 못하고, 의제 설정이나 의사결정 절차에 대한 제도화가 안 돼 있다”며 “실무급의 당정협의 조직을 강화하고 각급 협의체 간 연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2025-01-21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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