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공부방’의 작은 기적

‘기업 공부방’의 작은 기적

입력 2010-02-17 00:00
업데이트 2010-02-17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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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시 동문동의 삼성아파트. 화학·에너지기업 삼성토탈이 1991년에 지은 사원아파트(650가구)다. 지난해 봄까지만 해도 이곳 아이들은 방과 후 학원을 가거나 동네 어귀를 떠돌았다. 자녀교육 때문에 가족을 서울로 올려보낸 ‘기러기 아빠’들이 직원 1000여명 중 100여명이나 됐다. 열악한 교육·가정 환경에 직원들은 소외감을 느꼈다. 지난 9개월 사이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기러기 가족들이 사택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학원·과외를 중단하는 아이들도 늘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는 지난해 5월 문을 연 공부방 ‘아이비(Ivy) 스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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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기업 공부방으로서 성공 모델을 제시한 충남 서산 삼성토탈의 ‘아이비스쿨’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활짝 웃고 있다.
국내 최초의 기업 공부방으로서 성공 모델을 제시한 충남 서산 삼성토탈의 ‘아이비스쿨’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활짝 웃고 있다.


삼성토탈이 아파트 상가를 리모델링해 도서관과 200석 규모로 꾸민 무료이용 ‘사원자녀 교육센터’다. 얼마 전 이 공부방의 중학교 3학년생 19명 중 과학고·외국어고 합격자가 5명 나왔다. 2008년엔 1명도 없었다. 나머지 학생들도 비평준화 지역인 서산의 명문고에 합격함으로써 동문동이 단숨에 ‘서산의 8학군’으로 떠올랐다. 국내 첫 ‘기업공부방’인 아이비스쿨의 성공 비결이 관심을 끈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12일 밤 9시. 아이비스쿨은 학습 열기로 뜨거웠다. 13개 교실의 이름도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칭화대’ ‘서울대’ 등이다.

아이비스쿨은 ‘일하기 좋은 직장’을 실현하려는 유석렬 삼성토탈 사장의 첫 시도다.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회사가 고용한 전문 카운슬러가 상주하고 회사 직원 15명이 ‘멘토 교사’로 각 교실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오상준(카이스트 박사) 공정연구팀 차장은 매주 두 차례 멘토를 하고 있다. 중1년생인 그의 딸도 아이비스쿨에 다닌다. 오 차장은 “멘토들이 아빠, 엄마들이어서 일반 학원들이 모방할 수 없는 정서적 안정감이 장점”이라면서 “입시 공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키워 주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삼성토탈이 아이비스쿨 재학생 200명을 상대로 개별 조사한 결과 평균 2개꼴로 다니던 학원의 수가 1.4개로 줄었고 학원비는 중·고생 월평균 40만원에서 28만원으로 줄었다. 또 독서실 비용, 학원비 등 가구당 연간 325만원의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사택 근처 공부방의 전등은 매일 오전 1시에 꺼진다.

아이비스쿨이 역점을 둔 부분은 ‘낙오자 없는 교실’. 이곳에서 낙오자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꿈이 없는 아이들’이다. 학생들은 여름과 겨울방학 중에 서울대를 탐방하고 큰형·누나뻘인 서울대 재학생들과 대화 시간도 갖는다. 각계 명사들을 공부방으로 초청해 강연도 듣는다. 미국 MIT를 사상 첫 5.0 만점으로 졸업한 김지원(현재 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씨도 강연했다.

입소문이 퍼지자 삼성토탈은 지역의 소외계층 학생들에게도 자리를 10% 할애했다. ‘사원 복지’의 새로운 모델로 떠오른 이 기업공부방은 다른 대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기업 생산공장이 대부분 지방에 있는 현실에서 열악한 교육 환경에 따른 가족의 소외감, 구조적인 사교육비 문제, 지방근무 기피 현상 등을 극복할 수 있는 기업의 ‘의미 있는 실험’으로 평가된다.

글·사진 서산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2010-02-17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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